국제갤러리 전시장에서 자신의 폐기물 설치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안젤름 라일리.
국제갤러리 전시장에서 자신의 폐기물 설치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안젤름 라일리.
혹시 쓰레기 창고라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시장에 작품 대신 폐기물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다. 폐기물은 액자 플라스틱 형광등 공구 등 대부분 일상에서 쓰다 버린 물건들이다. 과연 이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일 작가 안젤름 라일리(43)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런 관객의 당혹감이다.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오는 12월31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왓 어바웃 러브(What about love?)’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폐기물과 예술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다양한 기성의 일상적·상업적 오브제를 본래의 맥락에서 끌어내려 새롭게 배열함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눕혀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것처럼 그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생산된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를 작품의 주요 재료로 삼는다. 그런 오브제는 알루미늄 포일, 아크릴 물감, 자동차용 도료, 일상적 쓰레기 등 다양하다. 전시 제목인 록그룹 하트(Heart)의 히트곡 ‘왓 어바웃 러브’조차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하나의 오브제일 뿐 전시의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이런 오브제들을 설치 회화 조각 등 다양한 형식을 빌려 조합한다.

그러나 작가는 단지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이 펼쳤던 다양한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상업적인 폐기물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미술사조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존재하며, 더 나아가 예술과 상업적 오브제의 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런 경계 허물기는 ‘알루미늄 포일 페인팅’에서도 두드러진다. 겉보기에는 얇은 알루미늄판을 구겨 주름 효과를 만들어 낸 것 같지만 실은 살짝만 건드려도 변형이 될 만큼 취약한 게 알루미늄 포일이다. 평면적으로 처리하고 이를 투명 합성수지 박스에 넣었다는 점에서는 회화를 연상시키지만 입체적으로 배열했다는 점에서는 조각이나 설치에 가깝다.

‘드리핑 페인팅’도 마찬가지다. 소화기에 아크릴 물감을 채워 바탕에 뿌린 후 그 위에 래커와 물감을 쏟아 부은 이 작품은 거리를 두고 보면 큰 붓으로 힘차게 그린 평면 추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액션 페인팅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일리의 이런 작업은 세계적인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게오르그 사치 컬렉션(런던), 다이믈러 컬렉션(베를린) 등 세계적 컬렉션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현재 뉴욕 최고 갤러리인 가고시안의 전속작가이기도 하다.

라일리는 “예술은 곧 문제 제기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관찰자의 몫”이라며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의지”라고 강조한다. 결국 전시장의 쓰레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인 셈이다.
(02)735-8449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