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비바람에 뿌리깊은 나무, 숙명
1895년,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선포한다. 교육을 통해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구국운동 신호탄을 쏜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서구의 문호 개방에 대한 외압이 기세를 올릴 때 이에 맞서 고종은 근대식 학제를 세운 것이다. 이때 왕실 재원으로 양정의숙(1905) 진명여학교(1906) 명신여학교(1906·현 숙명학원)가 설립된다. 근대 여성교육 학제를 기반으로 진명·숙명학원은 자주민족 정신의 학풍을 세우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 옛날 갑오개혁(1894)으로 국가의 미래를 바로 세워 보려고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고, 독립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눈물 어린 조선왕실의 노력은 짐짓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백여년의 역사가 흐른 뒤에 이렇게 버젓이 양정학교, 숙명, 진명여중고로 우뚝 세워졌다. 그리고 숙명학원은 숙명여전을 거쳐 대학교로 거듭 발전해갔다. 숙명여대는 ‘최초의 여성’으로서의 독립운동가(박자혜), 소설가(박화성), 현대무용가(최승희), 항공교육대(이정희), 독일 유학 피아니스트(이애내), 민항 여성 기장(신수진) 등 수없이 많은 탁월한 여성 인재를 배출해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여성교육을 통해 국권 회복과 근대화의 기적까지 이뤄냄으로써 왕실이 품었던 통한의 꿈, 독립과 인재 양성을 ‘다 이뤘다’고 가히 내놓을 만하다.

생각하건대, 우리 대학의 발전은 대한민국의 역사처럼 끊임없는 비바람 속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기금 모금의 효시라고 할 만큼 왕실학교 창립에 사회 인사들의 적극적 참여가 있었다. 1937년에는 숙명여전 창립을 위해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현대무용가 최승희(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는 미국 등 해외 공연을 앞두고 ‘최승희무용공연회’를 열어 거액의 수익금 전액을 창립비용으로 기부했다. 이에 더해 영친왕은 ‘효창공원부지’(현 캠퍼스)를 교사 신축에 무상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숙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부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내가 쓸 것이 있어도 안 쓰고 내주는 것’이 기부정신이라고 말한다. 강의실, 연주홀, 백주년기념관, 도서관, 캠퍼스 발 닿는 곳마다 이 정신이 생생하게 깃들어 있다. 나라를 잃었던 선각자들의 피땀 어린 기도와 동문 및 기업가들의 정성이 응집된 이곳,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뿌리가 여기에 있어서다.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