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새누리당 역사적 소명 끝났다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책사 윤여준이 먼저 한 마리 제비가 되어 돌아왔다. 새판짜기 봄 소식은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25년 한 세대가 지나면서 87체제라는 낡은 판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일 것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투쟁 프레임에 갇혀 마지막 한 명의 지지자가 등을 돌릴 때까지 낡은 레코드를 틀고 있다. ‘변호인’이라는 또 한 장 픽션의 효험을 기대하면서 지방선거까지 내처 달릴 태세다. 충무로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는 추억을 회상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부림사건이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의식화 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픽션이기에 용서받는 역사 왜곡은 교과서 문제에서 보듯이 좌익의 오랜 투쟁수단이다. 물론 픽션과 논픽션, 추억과 현실은 종종 심각한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부림사건은 2009년 이 사건 재심에서 내려진 유죄 판결을 보더라도 그 성격이 명백하다. 문재인 전 대선후보는 100여명을 모아 흘러간 가요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싸구려 기억의 정치다. 민주당은 패배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래서 1년 내내 불복이었다. 검투사 채동욱의 논리에 말려들기도 했을 것이다. 안철수를 통해 ‘탈 민주화 생활진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이 호남의 정서라는 분석도 있다. 민주화 프레임을 버리겠다는 면에서는 좋은 변화다. 추억의 마지막 한 톨 전략인 민주당은 비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새누리당 역시 소명을 다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누리’라는 허구의 간판을 이제는 떼어낼 때가 되었건만. 그러나 어떤 일에도 책임자가 없는 정당이다. 새누리는 영어 당명조차 쓸 수 없다. New World Party라고 하면 무슨 좌익혁명 정당인줄 알까봐 절대로 쓸 수 없다. 일본에서는 그냥 발음기호만 따서 セヌリ라고 가타카나로 쓴다. 굳이 설명을 붙일 때는 新世界라고 표현한다. 중국은 新國家黨이라고 부른다. 무슨 나치당도 아니고…. 어감도 좋지 않고 정체도 불명이다. 부끄럽다. 그런데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빨간 재킷을 차려입고 이념의 난파선을 자처하는 정치공학이 역겹다. 경제적 자유를 가로막고 결과적 평등을 강요함으로써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숨통을 끊어 놓자는 것이 경제민주화다. 집단의 선의는 종종 전체를 지옥으로 안내한다. 경제민주화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새누리에서는 경보조차 울리지 않는다.

일부 최고위원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새누리당은 이념의 백치요 지성의 공백이며 도덕의 무정부다. 협동조합이 이다지도 정치적 논란이 될 줄도 몰랐고, 철도파업이 왜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하며, 내각이 왜 저리 무기력한지는 이해 불능이다. 또 박원순 시장의 무엇이 문제인 줄조차 몰라 그저 명망가만 내세우면 시장 선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정당이다. 더구나 차기로 거론되는 인물이 불법 파업 수배자의 손을 잡고 “우리가 남이가”식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장면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적당한 타협을 소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법치가 소통의 조건이라고 말한 부분은 명언이요 웅변이다. 새누리당은 왜 좌익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광기의 공격을 퍼붓는지도 알지 못한다. 교육부 장관도 새누리당도 말이 없다. 얼굴을 붉혀야 풀리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오렌지다.

지력도 이미 고갈되었다. 연말 그 난장판 국회에서 “때는 이때”라며 또 쪽지를 끼워 넣는 것은 당 간부들의 오랜 특권이다. 박 대통령을 당선시킴으로써 새누리당의 역사적 소명은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민소득 4만달러가 되려면 그것에 걸맞은 제도와 관행, 법치 체계, 지식 수준, 기업 환경, 노동 시장의 시스템적 조건들이 필요하다. 4만달러 국가들과 1만달러도 안되는 후진국들의 면면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한국 정치는 이 4만달러에 필요한 아비투스를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다. 정치는 오히려 국민소득 5000달러로 돌아가자고, 형편과 실력에 맞추어 편하고 쉽게 살자며 한국인을 유혹하고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