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商 출신 첫 삼성전자 임원 양향자 상무의 인생 도전기…"'알아서 할게'는 회피가 아닌 약속입니다"
30여년 전 전남 화순군 쌍봉리 두메산골에 한 소녀가 살았다.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이 소녀는 고교 입학원서를 쓰기 하루 전 편찮았던 아버지에게서 “오래 못 살 것 같다. 동생들 뒷바라지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답한 그는 다음날 눈물을 머금고 광주여자상업고에 원서를 낸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지난해 말. 이 소녀는 삼성전자 사상 첫 여상(女商) 출신 임원에 올랐다. 양향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상무(47·사진)가 주인공이다.

양 상무는 14일 대전 충남대에서 삼성 토크콘서트 ‘열정락서’의 올해 첫 멘토로 나섰다. 연구보조원으로 입사해 반도체 글로벌 1위 업체의 ‘별’을 달기까지 ‘인생 스토리’를 전했다. 삼성의 교육 사회공헌사업인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읍·면·도서지역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우리 중학생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내가 알아서 할게’라면서요.” 이렇게 운을 뗀 양 상무는 “‘내가 알아서 할게’는 회피가 아닌 약속”이라며 “요즘 청소년들이 부모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쓰는 이 말이, 저에겐 아버지와의 첫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삼성전자에 연구보조원으로 들어갔다. 연구원이 반도체를 설계하면 그것을 도면에 그리는 단순 업무였다. 그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리는 단순 작업을 하면서 늘 ‘공부하고 싶다’ ‘저걸 알아야만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 돕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또 한번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약속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닌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공부했다. 주변의 ‘반도체 고수’를 찾아 묻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배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1995년 사내대학에서 학사를, 2008년 성균관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 반도체 설계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양 상무는 “남을 부러워하기보다 내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상고 출신의 여성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뛰어넘은 양 상무는 “여러분도 가장 먼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스스로와 약속해 보라”며 “스스로 열심히 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어하고 그럼 결코 외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