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긋 웃는 입과 불룩 넙적한
"드로잉은 감성의 블랙박스…진짜 그림 맛 나죠"
코가 매력적인 돌하르방, 막걸리를 마시며 쓰다듬던 늙은 호박,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예쁜 부레옥잠, 돌담 밑의 수선화, 먹음직스러운 당유자…. 제주의 다양한 질감은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처럼 마음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한다. 이런 제주의 감성이 감지되는 강요배식 드로잉의 음악성은 완벽한 리듬과 경쾌함, 따뜻한 서정성을 대표한다.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말이다.

1992년 서울 창문여고 교사 생활을 접고 23년째 제주시 인근 귀덕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서양화가 강요배 씨(62·사진)의 소묘전이 내달 3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펼쳐진다. 강씨는 그동안 제주의 자연을 서정적 붓질로 화폭에 담아 왔다. 서울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민족미술인협회장, 탐라미술협회 대표를 했고, 1998년에는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한때 삽화가로도 활동했던 강씨는 이번 전시에 과장된 표현이나 지나친 생략을 경계하고 원칙에 충실했던 1980년대 초기 작품부터 도서 삽화, 금강산 답사 스케치, 제주 풍경,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드로잉 50여점을 내보인다.

출품작들은 극적인 리얼리즘이 밴 자유로움과 즉흥적 감흥을 선사한다. 돌하르방, 해금강 풍경, 여성의 뒷모습 등 대상의 특징을 잘 압축한 데다 속도감 있게 그려 경쾌한 리듬감도 느껴진다. 드로잉은 화가의 상상이 시작되는 ‘감성의 블랙박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드로잉은 작가의 기술을 시험하는 연습장이며 감정과 생각을 담은 메모장”이라며 “거칠고, 솔직하고, 왕성한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기에 드로잉은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장르”라는 것이다.

“최근 디지털 시대의 미술은 카메라, 스마트폰, 영상 장치 등 도구가 너무 많이 개입해 그림의 맛이 좀 떨어져요. 그림은 몸을 통해 흐르는 마음 같은 것이거든요. 더구나 소묘에는 한 번에 가는 맛, 몸으로 하는 맛 같은 ‘그림의 맛’이 느껴집니다.”

강씨는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대로 그리다 보니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이 있긴 하지만 ‘날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들”이라며 “인생에 있어 기쁜 순간, 방황의 고비마다 늘 힘이 돼줬던 다정한 이웃과 가족이 내 그림에 함께 있어 항상 든든하다”고 했다. (02)720-152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