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강방천 회장 "라디오·사회과부도가 어릴때 친구…섬마을서 꿈 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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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회장
초·중 시절은 '孤島 캠퍼스'
TV 없어 상상력에 날개 달고 사물과 뉴스에 대한 분석력 키워
가치주 대박 신화 쓰다
국내 처음으로 低PER주 발굴…운용사 설립해 펀드 수익률 1등
90세까지 펀드매니저 하고파
초·중 시절은 '孤島 캠퍼스'
TV 없어 상상력에 날개 달고 사물과 뉴스에 대한 분석력 키워
가치주 대박 신화 쓰다
국내 처음으로 低PER주 발굴…운용사 설립해 펀드 수익률 1등
90세까지 펀드매니저 하고파
“보이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증권업계에 몸을 담은 순간부터 주가라는 ‘숫자’ 뒤에 숨은 기업의 본질을 탐구하고 기업의 미래를 상상했다. 이게 ‘강방천식 투자법’이다.
“대한민국 인구는 1억5000만명.” 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회장(54)은 평소 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제 인구(약 5000만명)보다 3배나 많은 수치다. ‘숫자의 정확성’을 중시하는 펀드매니저가 사실과 다른 숫자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 강 회장은 “해외를 다녀 보니 한국인 한 명이 외국인 세 명 몫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일당삼(一當三)’이니까 5000만명에 3을 곱해도 된다는 것.
‘강방천식’ 인구 계산법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보이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증권업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가라는 ‘숫자’ 뒤에 숨은 기업의 본질(가치)을 탐구해 오고 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치주 발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는다. “성공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하고 열정은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소신을 가진 그는 ‘한국 가치투자계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라디오 듣고 상상력 키워”
강 회장의 단골 음식점은 서울 청담동 이탈리아 음식점 ‘리스토란테 에오’다. 벽에 걸린 미술품을 쳐다보던 강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내 방엔 ‘사회과부도’ 지도가 붙어 있었다”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강 회장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巖泰島)라는 섬이다. 목포에서 배로 1시간30분 거리다. 바위가 많은 척박한 땅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섬엔 TV가 없었다. 그가 ‘고도(孤島) 캠퍼스’라고 표현한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라디오 뉴스가 유일한 단짝 친구였다. 라디오 뉴스는 강 회장이 상상력을 연습하는 교재였다. ‘맹호부대가 파괴한 베트콩 탱크’ ‘서울 길거리 모습’ 등도 머릿속에 그려보던 메뉴였다.
라디오 뉴스에선 국내외 지명도 들렸다. 문득 ‘전쟁이 난 베트남,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을까’가 궁금해졌다. 삼촌이 쓰던 사회과부도를 구해 지도를 벽에 붙였다. 이후 라디오에서 지명이 나오면 지도로 곧장 달려갔다. 점을 찍고 이리저리 살피곤 했다. 지도를 벗 삼으며 큰 시각에서 보는 법과 좁고 치밀한 영역까지 살펴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을 멀리 혹은 가까이서, 원대하고 치밀하게 해석하는 연습도 이때 했습니다.”
“공모주 분석하며 기초 닦아”
전채요리로 단호박 수프가 나오자 강 회장이 서울에 상경한 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의 명문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건 1980년이다. 3년간 앓았던 기관지 천식이 1980년 말에 심해졌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입대. 공기 좋은 곳에서 살면 치유될 것 같았다. 강원 인제의 육군 2사단 생활 1개월 만에 천식은 거짓말처럼 나았다.
“천식 때문에 평소 5m를 뛰기도 어려웠는데 군대에서 체력 측정할 때 4㎞를 달리는 데 성공했죠. 그래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하고 생각했죠.”
군대 있을 때도 늘 미래 사회의 모습을 상상했다. 컴퓨터와 기업 경영이 그의 ‘상상 연습’ 주요 재료였다. 1983년 휴가를 받아 학력고사를 다시 봤다. 마침 한국외대에 경영학과 컴퓨터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경영정보학과’가 생겼다. 4년 장학생으로 경영정보학과 84학번 새내기가 됐다.
전산학보다는 회계학에 푹 빠졌다. 기업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어서다. 7학기 만에 조기 졸업한 1987년, 동방증권(현 SK증권)에 첫 직장을 얻었다.
통통한 지중해식 홍새우가 입안에서 ‘톡’하고 터졌다. 와인 잔을 만지작대던 강 회장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전공 때문인지 정말 가기 싫었던 전산실에 배치됐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내 주식부에서 공모주 유가증권신고서를 들고와 혼자서 ‘기업 가치’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회계 지식 덕분에 어렵지는 않았다. “당시 건설사 한 곳이 부도나면 모든 건설주가 우수수 떨어지는 게 이상하더라고요. 반사이익을 볼 만한 건설사들이 눈에 보였거든요.” 이때 시작한 기업가치 분석은 평생의 주특기가 됐다.
증권주 가치투자가 안겨준 100억원
1989년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으로 스카우트된 뒤 회삿돈 200억원을 굴리는 일을 맡았다. “시가총액과 주가수익비율(PER·주가를 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수익지표)을 계산해 투자 지표로 삼은 것은 이때 내가 국내에서 처음 시도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천운도 따랐다. 1992년 주식시장이 개방되자 외국인은 저(低)PER주에 주목했다. 1년 만에 10배 오른 종목들이 등장했다. 그가 운용하던 회사 자금은 300억원으로 불어났다.
부드러운 한우 안심스테이크가 나왔다. 나이프로 한 점 썰던 강 회장은 ‘가치주 대박 신화’를 들려줬다. 공동 창업시기를 거쳐 개인 투자를 하던 1997년의 일이다. 외환위기로 증권주 주가는 액면가의 10%인 500~600원까지 떨어졌다. 강 회장은 국내 자본시장이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증권주들이 살아날 것으로 봤다. 대신증권 대우증권 부국증권 우선주를 사 모았다. 우리 사회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확산됐다. 1998년 미래 가치를 반영해 증권주들이 빠르게 상승했다. 500원짜리가 3개월 만에 1만2000원이 됐다. 강 회장은 100억원 넘게 벌었다.
1999년 2월, 강 회장은 평생의 꿈이던 ‘투자자문사’를 설립한다. 에셋플러스투자자문이다. 스스로 ‘독특한 회사’였다고 말했다. ‘성과 보수’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고객 돈으로 주식을 계속 사고팔아 수수료 수익을 얻는 게 아니라, 정당하게 고객 돈을 불려주고 그 대가를 받자는 의도였다. 2002년엔 더 많은 자금을 운용해 달라던 국민연금 요청을 고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용 자산이 지나치게 커지면 합리적인 운용에 문제가 생긴다는 신념 때문이다.
2008년엔 운용사로 전환했다. 판매 수수료를 없애기 위해 펀드를 직접 팔았다. 고객과 제대로 소통해야 한다는 신념도 작용했다. 에셋플러스를 제외한 모든 운용사가 은행과 증권사 창구에 의존하던 때였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2년 전쯤 ‘6개월간’의 수익률이 시장 대비 뒤처졌다는 이유로 가장 큰 기관투자가가 떠난 적이 있다. 회사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가 닥쳤다.
“수천억원의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당장 수십억원의 적자가 나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비행기 표부터 끊고 그동안 친분을 쌓아온 해외 가치투자자들에게 찾아갔어요. 장시간 토론을 하고 위안을 받은 다음 돌아왔지요.”
강 회장은 귀국한 뒤 ‘장기 가치투자’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수익률은 얼마 안가 회복됐다. 14일 기준 에셋플러스의 국내주식형펀드 5년 수익률(103.31%)은 국내 운용사 중 압도적인 1위다.
“90세까지 펀드매니저 하고 싶다”
주요리인 광어구이가 나올 무렵 강 회장에게 가치투자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시곗바늘이 밤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는 “기업의 본질 가치가 주가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라는 신념,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콜릿 소스가 곁들여진 수제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입이 개운해졌다.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더니 “90세까지 내가 직접 운용하는 펀드에 정성과 애정을 쏟는 펀드매니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자전거 타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궁합에 맞는 걸 많이 갖고 있어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며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사색하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고 전했다.
강 회장은 운전기사를 두지 않는다. 펀드 운용처럼 운전도 직접 한다. 인터뷰 후 미군의 전투차량 ‘험비’를 닮은 검은색 지프에 강 회장이 몸을 실었다. 흔들리지 않은 가치투자 신념처럼 그의 지프도 도로 위에서 묵직하게 움직였다.
서울 역삼동 본사, 판교로 옮긴 까닭은
강방천 회장은 지난 3월 본사를 서울 역삼동 파이낸스센터에서 경기 판교 ‘리치투게더센터’로 옮겼다. 나중엔 ‘직원들의 동의’를 전제로 본사를 제주로 옮길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 강 회장이 ‘증권의 본산’ 여의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가치·분산투자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강방천 회장의 단골집 ‘리스토란테 에오’
점심·저녁 코스 4종 뿐인 이탈리아 요리
‘리스토란테 에오’는 단골 손님 강방천 회장의 에셋플러스자산운용과 많이 닮았다. 전채 파스타 스테이크 디저트 등으로 구성된 점심 코스 2종, 저녁 코스 2종이 메뉴의 전부다. 에셋플러스의 펀드 상품도 4종이다. 강 회장은 “메뉴가 적다는 것은 한 요리에 정성을 쏟아 넣겠다는 뜻”이라며 “소수 펀드에 집중하는 에셋플러스의 철학과 닮았다”고 말했다.
‘오너’가 직접 현업에서 뛴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어윤권 리스토란테 에오 사장은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을 한 주방장이다. 지금도 메뉴 구성과 조리를 담당한다. 강 회장도 직접 펀드를 굴린다. 어 사장과 강 회장이 그만두지 않는 한, 음식의 맛과 펀드의 운용철학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음식의 맛과 펀드 스타일이 꾸준히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적정 손님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리스토란테 에오의 식탁은 5개다. 고객 취향을 고려해 최상의 음식을 서비스하기 위해서다. 강 회장도 한 펀드의 최대 설정액을 5000억원 정도로 제한할 계획이다.
메뉴를 구성하는 음식은 매일 바뀐다. 어 사장이 식재료에 따라 고객과 조율해 음식을 내놓기 때문이다. 점심(낮 12시~오후 3시) 코스는 3만8000원, 6만1000원이다. 저녁 코스(오후 6시30분~10시30분)는 7만7000원, 9만9000원이다. (02)3445-1926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강방천식’ 인구 계산법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보이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증권업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가라는 ‘숫자’ 뒤에 숨은 기업의 본질(가치)을 탐구해 오고 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치주 발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는다. “성공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하고 열정은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소신을 가진 그는 ‘한국 가치투자계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라디오 듣고 상상력 키워”
강 회장의 단골 음식점은 서울 청담동 이탈리아 음식점 ‘리스토란테 에오’다. 벽에 걸린 미술품을 쳐다보던 강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내 방엔 ‘사회과부도’ 지도가 붙어 있었다”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강 회장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巖泰島)라는 섬이다. 목포에서 배로 1시간30분 거리다. 바위가 많은 척박한 땅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섬엔 TV가 없었다. 그가 ‘고도(孤島) 캠퍼스’라고 표현한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라디오 뉴스가 유일한 단짝 친구였다. 라디오 뉴스는 강 회장이 상상력을 연습하는 교재였다. ‘맹호부대가 파괴한 베트콩 탱크’ ‘서울 길거리 모습’ 등도 머릿속에 그려보던 메뉴였다.
라디오 뉴스에선 국내외 지명도 들렸다. 문득 ‘전쟁이 난 베트남,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을까’가 궁금해졌다. 삼촌이 쓰던 사회과부도를 구해 지도를 벽에 붙였다. 이후 라디오에서 지명이 나오면 지도로 곧장 달려갔다. 점을 찍고 이리저리 살피곤 했다. 지도를 벗 삼으며 큰 시각에서 보는 법과 좁고 치밀한 영역까지 살펴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을 멀리 혹은 가까이서, 원대하고 치밀하게 해석하는 연습도 이때 했습니다.”
“공모주 분석하며 기초 닦아”
전채요리로 단호박 수프가 나오자 강 회장이 서울에 상경한 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의 명문 목포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건 1980년이다. 3년간 앓았던 기관지 천식이 1980년 말에 심해졌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입대. 공기 좋은 곳에서 살면 치유될 것 같았다. 강원 인제의 육군 2사단 생활 1개월 만에 천식은 거짓말처럼 나았다.
“천식 때문에 평소 5m를 뛰기도 어려웠는데 군대에서 체력 측정할 때 4㎞를 달리는 데 성공했죠. 그래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하고 생각했죠.”
군대 있을 때도 늘 미래 사회의 모습을 상상했다. 컴퓨터와 기업 경영이 그의 ‘상상 연습’ 주요 재료였다. 1983년 휴가를 받아 학력고사를 다시 봤다. 마침 한국외대에 경영학과 컴퓨터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경영정보학과’가 생겼다. 4년 장학생으로 경영정보학과 84학번 새내기가 됐다.
전산학보다는 회계학에 푹 빠졌다. 기업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어서다. 7학기 만에 조기 졸업한 1987년, 동방증권(현 SK증권)에 첫 직장을 얻었다.
통통한 지중해식 홍새우가 입안에서 ‘톡’하고 터졌다. 와인 잔을 만지작대던 강 회장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전공 때문인지 정말 가기 싫었던 전산실에 배치됐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내 주식부에서 공모주 유가증권신고서를 들고와 혼자서 ‘기업 가치’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회계 지식 덕분에 어렵지는 않았다. “당시 건설사 한 곳이 부도나면 모든 건설주가 우수수 떨어지는 게 이상하더라고요. 반사이익을 볼 만한 건설사들이 눈에 보였거든요.” 이때 시작한 기업가치 분석은 평생의 주특기가 됐다.
증권주 가치투자가 안겨준 100억원
1989년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으로 스카우트된 뒤 회삿돈 200억원을 굴리는 일을 맡았다. “시가총액과 주가수익비율(PER·주가를 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수익지표)을 계산해 투자 지표로 삼은 것은 이때 내가 국내에서 처음 시도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천운도 따랐다. 1992년 주식시장이 개방되자 외국인은 저(低)PER주에 주목했다. 1년 만에 10배 오른 종목들이 등장했다. 그가 운용하던 회사 자금은 300억원으로 불어났다.
부드러운 한우 안심스테이크가 나왔다. 나이프로 한 점 썰던 강 회장은 ‘가치주 대박 신화’를 들려줬다. 공동 창업시기를 거쳐 개인 투자를 하던 1997년의 일이다. 외환위기로 증권주 주가는 액면가의 10%인 500~600원까지 떨어졌다. 강 회장은 국내 자본시장이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증권주들이 살아날 것으로 봤다. 대신증권 대우증권 부국증권 우선주를 사 모았다. 우리 사회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확산됐다. 1998년 미래 가치를 반영해 증권주들이 빠르게 상승했다. 500원짜리가 3개월 만에 1만2000원이 됐다. 강 회장은 100억원 넘게 벌었다.
1999년 2월, 강 회장은 평생의 꿈이던 ‘투자자문사’를 설립한다. 에셋플러스투자자문이다. 스스로 ‘독특한 회사’였다고 말했다. ‘성과 보수’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고객 돈으로 주식을 계속 사고팔아 수수료 수익을 얻는 게 아니라, 정당하게 고객 돈을 불려주고 그 대가를 받자는 의도였다. 2002년엔 더 많은 자금을 운용해 달라던 국민연금 요청을 고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용 자산이 지나치게 커지면 합리적인 운용에 문제가 생긴다는 신념 때문이다.
2008년엔 운용사로 전환했다. 판매 수수료를 없애기 위해 펀드를 직접 팔았다. 고객과 제대로 소통해야 한다는 신념도 작용했다. 에셋플러스를 제외한 모든 운용사가 은행과 증권사 창구에 의존하던 때였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2년 전쯤 ‘6개월간’의 수익률이 시장 대비 뒤처졌다는 이유로 가장 큰 기관투자가가 떠난 적이 있다. 회사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가 닥쳤다.
“수천억원의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당장 수십억원의 적자가 나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비행기 표부터 끊고 그동안 친분을 쌓아온 해외 가치투자자들에게 찾아갔어요. 장시간 토론을 하고 위안을 받은 다음 돌아왔지요.”
강 회장은 귀국한 뒤 ‘장기 가치투자’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수익률은 얼마 안가 회복됐다. 14일 기준 에셋플러스의 국내주식형펀드 5년 수익률(103.31%)은 국내 운용사 중 압도적인 1위다.
“90세까지 펀드매니저 하고 싶다”
주요리인 광어구이가 나올 무렵 강 회장에게 가치투자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시곗바늘이 밤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는 “기업의 본질 가치가 주가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라는 신념,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콜릿 소스가 곁들여진 수제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입이 개운해졌다.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더니 “90세까지 내가 직접 운용하는 펀드에 정성과 애정을 쏟는 펀드매니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자전거 타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궁합에 맞는 걸 많이 갖고 있어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며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사색하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고 전했다.
강 회장은 운전기사를 두지 않는다. 펀드 운용처럼 운전도 직접 한다. 인터뷰 후 미군의 전투차량 ‘험비’를 닮은 검은색 지프에 강 회장이 몸을 실었다. 흔들리지 않은 가치투자 신념처럼 그의 지프도 도로 위에서 묵직하게 움직였다.
서울 역삼동 본사, 판교로 옮긴 까닭은
강방천 회장은 지난 3월 본사를 서울 역삼동 파이낸스센터에서 경기 판교 ‘리치투게더센터’로 옮겼다. 나중엔 ‘직원들의 동의’를 전제로 본사를 제주로 옮길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 강 회장이 ‘증권의 본산’ 여의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가치·분산투자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강방천 회장의 단골집 ‘리스토란테 에오’
점심·저녁 코스 4종 뿐인 이탈리아 요리
‘리스토란테 에오’는 단골 손님 강방천 회장의 에셋플러스자산운용과 많이 닮았다. 전채 파스타 스테이크 디저트 등으로 구성된 점심 코스 2종, 저녁 코스 2종이 메뉴의 전부다. 에셋플러스의 펀드 상품도 4종이다. 강 회장은 “메뉴가 적다는 것은 한 요리에 정성을 쏟아 넣겠다는 뜻”이라며 “소수 펀드에 집중하는 에셋플러스의 철학과 닮았다”고 말했다.
‘오너’가 직접 현업에서 뛴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어윤권 리스토란테 에오 사장은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을 한 주방장이다. 지금도 메뉴 구성과 조리를 담당한다. 강 회장도 직접 펀드를 굴린다. 어 사장과 강 회장이 그만두지 않는 한, 음식의 맛과 펀드의 운용철학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음식의 맛과 펀드 스타일이 꾸준히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적정 손님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리스토란테 에오의 식탁은 5개다. 고객 취향을 고려해 최상의 음식을 서비스하기 위해서다. 강 회장도 한 펀드의 최대 설정액을 5000억원 정도로 제한할 계획이다.
메뉴를 구성하는 음식은 매일 바뀐다. 어 사장이 식재료에 따라 고객과 조율해 음식을 내놓기 때문이다. 점심(낮 12시~오후 3시) 코스는 3만8000원, 6만1000원이다. 저녁 코스(오후 6시30분~10시30분)는 7만7000원, 9만9000원이다. (02)3445-1926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