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에서 수(水)처리 업체를 운영하는 K사장은 작년까지 매년 중소기업 정책자금을 받기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신청서를 냈다. 발명특허 4개, 국제표준화기구(ISO) 인증을 갖고 있어 내심 기대가 컸지만 번번이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비슷한 사업을 하는 다른 회사는 기술력도 떨어지는데 2~3개 자금을 중복 지원받는 걸 보면 부아가 치민다. K씨는 “기술력, 성장 가능성과 관계없이 브로커를 잘 쓰면 정책자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 만한 이들은 다 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에서 중소·벤처기업에 주는 정책자금은 넘쳐난다.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에 더해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공단도 조(兆) 단위로 자금을 지원한다.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지역신용보증기금 등에서 대출 보증도 서 주고, 지방자치단체의 금융 지원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예산은 2010년 9조6568억원에서 작년 10조5670억원으로 급증했다. 보증·융자, 공공구매 지원 등 간접 지원까지 포함하면 정부의 정책자금 지원 규모는 작년 171조7000억원에 달한다. 2011년 158조3000억원, 2012년 164조3000억원에 이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왜 기업가 정신인가] 정부 지원금은 '눈먼 돈'…툭하면 브로커 끼어들어 "반반 나누자"
그러나 자금 지원 방식은 엉성하기 그지없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기관이 기술개발, 신기술창업 등 자금 지원 용도와 관계없이 대상 기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주는 개발기술사업화 자금 신청과정을 보자. 이 자금을 신청하려면 기업은 7페이지에 달하는 서류에 회사 경영자 이력, 기술개발 실적, 사업성과 등을 빼곡히 적은 뒤 신기술·제품의 특징, 기술개발 효과, 경쟁사 현황까지 적어내야 한다. 자금지원 판단 주체인 공단은 현장조사를 거치지만 이 서류 위주로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A벤처캐피털 관계자는 “기업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기술, 신제품 트렌드를 파악하지 못하는데 전문성이 떨어지는 정부기관이 해당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다 보니 정책자금이 ‘눈먼 돈’처럼 인식된다. 소품디자인 제작업체 P사는 올해 초 중소기업청에서 주는 ‘창업선도대학 지원사업’에 신청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뒤 브로커가 연락해왔다. 브로커는 ‘해당 자금 심사위원을 잘 아니, 5000만원의 정책자금을 받은 뒤 절반씩 나누자’고 제안했다. 미래창조과학부의 ‘벤처기업 지원사업’에선 심사위원이 자신이 투자한 업체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는 일도 있었다.

중복 지원도 문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 수출 지원자금 사업의 경우 유사·중복 지원 규모가 1834억원에 달한다. 중소기업청, KOTRA, 중소기업진흥공단, 미래창조과학부 등 4개 부처·기관이 비슷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많다. 이영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정책자금 지원 정책은 백화점 나열식으로 다양한 부처에서 중복 지원하는 비효율적인 구조가 문제”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이태명 팀장, 정인설(산업부) 전설리(IT과학부) 윤정현(증권부) 박신영(금융부) 전예진(정치부) 김주완(경제부) 임현우(생활경제부) 조미현(중소기업부) 양병훈(지식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