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단의 큰 별' 95세에 스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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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화백 별세
구상·추상 합친 '하모니즘' 창시
"누드화로 여인의 희로애락 표현"
43세 나이차 제자와 결혼 '화제'
구상·추상 합친 '하모니즘' 창시
"누드화로 여인의 희로애락 표현"
43세 나이차 제자와 결혼 '화제'
한국 화단의 큰 별이 졌다. 9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작업해왔던 김흥수 화백이 9일 오전 3시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화백의 유족은 “고인이 그동안 전립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지만 매우 편안하게 가셨다”고 전했다.
김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예술원 원로 회원이자 해방 후 서양화 1세대 작가로 꼽힌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1936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밤의 정물’로 입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의 원본은 화방에 불이 나는 바람에 소실됐다.
일본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학교 교수, 덕성여대 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한 김 화백은 1973년 상반된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리고 구상과 추상을 합친 ‘하모니즘’ 기법을 창조했다.
1950년대 초반 하모니즘 원리를 창안한 뒤 작품화하는 데 2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의 하모니즘 화풍은 외국에서 먼저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미술관, 1993년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음양조형주의’로 해석되는 그의 하모니즘은 양의 부분에 대개 에로티시즘의 나부를 비롯해 승무·불상·전통춤·탈 등 모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로 채우고, 음의 부분에는 현대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탁월한 색채 감각에 의해 추상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고인은 미술 대중화에도 앞장 섰다. 2000년 이후 세 차례 척추 수술로 휠체어와 지팡이 신세를 졌으나 그 와중에도 서울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 ‘영재미술교실’을 열고 1주일에 한 번씩 어린이들을 상대로 꼬박꼬박 미술교육을 펼쳤다.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1999년), 제2회 올해의 미술인상(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2010년), 석주미술상 특별상(2011년) 등을 받았다.
1992년에는 제자인 고 장수현 씨와 43세라는 나이 차를 딛고 결혼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부인 장씨는 난소암에 걸려 4년간 투병하다 2012년 11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김 화백은 특히 여체를 영혼을 다독이는 주요 주제로 삼아왔다. 생전에 자신의 누드화에 대해 “단순히 여인의 피부,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허무와 끝없는 욕망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최근 작업실에서 여체를 응결시켜 그린 누드화는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알아야 할 노랫가락처럼 다가온다. 유족은 해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 3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오는 13일.
02-2072-201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김 화백의 유족은 “고인이 그동안 전립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지만 매우 편안하게 가셨다”고 전했다.
김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예술원 원로 회원이자 해방 후 서양화 1세대 작가로 꼽힌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1936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밤의 정물’로 입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의 원본은 화방에 불이 나는 바람에 소실됐다.
일본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학교 교수, 덕성여대 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한 김 화백은 1973년 상반된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리고 구상과 추상을 합친 ‘하모니즘’ 기법을 창조했다.
1950년대 초반 하모니즘 원리를 창안한 뒤 작품화하는 데 2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의 하모니즘 화풍은 외국에서 먼저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미술관, 1993년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음양조형주의’로 해석되는 그의 하모니즘은 양의 부분에 대개 에로티시즘의 나부를 비롯해 승무·불상·전통춤·탈 등 모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로 채우고, 음의 부분에는 현대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탁월한 색채 감각에 의해 추상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고인은 미술 대중화에도 앞장 섰다. 2000년 이후 세 차례 척추 수술로 휠체어와 지팡이 신세를 졌으나 그 와중에도 서울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 ‘영재미술교실’을 열고 1주일에 한 번씩 어린이들을 상대로 꼬박꼬박 미술교육을 펼쳤다.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1999년), 제2회 올해의 미술인상(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2010년), 석주미술상 특별상(2011년) 등을 받았다.
1992년에는 제자인 고 장수현 씨와 43세라는 나이 차를 딛고 결혼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부인 장씨는 난소암에 걸려 4년간 투병하다 2012년 11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김 화백은 특히 여체를 영혼을 다독이는 주요 주제로 삼아왔다. 생전에 자신의 누드화에 대해 “단순히 여인의 피부,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허무와 끝없는 욕망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최근 작업실에서 여체를 응결시켜 그린 누드화는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알아야 할 노랫가락처럼 다가온다. 유족은 해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 3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오는 13일.
02-2072-201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