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단의 큰 별' 95세에 스러지다
한국 화단의 큰 별이 졌다. 9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작업해왔던 김흥수 화백이 9일 오전 3시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화백의 유족은 “고인이 그동안 전립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지만 매우 편안하게 가셨다”고 전했다.

김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예술원 원로 회원이자 해방 후 서양화 1세대 작가로 꼽힌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1936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밤의 정물’로 입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의 원본은 화방에 불이 나는 바람에 소실됐다.

일본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학교 교수, 덕성여대 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한 김 화백은 1973년 상반된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리고 구상과 추상을 합친 ‘하모니즘’ 기법을 창조했다.

1950년대 초반 하모니즘 원리를 창안한 뒤 작품화하는 데 2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의 하모니즘 화풍은 외국에서 먼저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미술관, 1993년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음양조형주의’로 해석되는 그의 하모니즘은 양의 부분에 대개 에로티시즘의 나부를 비롯해 승무·불상·전통춤·탈 등 모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로 채우고, 음의 부분에는 현대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탁월한 색채 감각에 의해 추상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고인은 미술 대중화에도 앞장 섰다. 2000년 이후 세 차례 척추 수술로 휠체어와 지팡이 신세를 졌으나 그 와중에도 서울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 ‘영재미술교실’을 열고 1주일에 한 번씩 어린이들을 상대로 꼬박꼬박 미술교육을 펼쳤다. 이런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1999년), 제2회 올해의 미술인상(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2010년), 석주미술상 특별상(2011년) 등을 받았다.

1992년에는 제자인 고 장수현 씨와 43세라는 나이 차를 딛고 결혼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부인 장씨는 난소암에 걸려 4년간 투병하다 2012년 11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김 화백은 특히 여체를 영혼을 다독이는 주요 주제로 삼아왔다. 생전에 자신의 누드화에 대해 “단순히 여인의 피부,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허무와 끝없는 욕망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최근 작업실에서 여체를 응결시켜 그린 누드화는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알아야 할 노랫가락처럼 다가온다. 유족은 해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 3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오는 13일.

02-2072-201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