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6월22일 오후 4시15분

“자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신용평가회사들이 매긴 신용등급보다 형편없는 재무 상태를 갖고 있는 기업이 많습니다. 신용평가사 등급만 믿고는 제대로 된 채권 매매를 할 수가 없어요.”(A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 국내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 장사’로 정상적인 채권 투자가 어려울 정도로 시장 왜곡이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신용평가사들이 일감 수주를 위해 높은 등급을 남발, ‘등급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사가 매긴 신용등급 중 A등급 이상의 비중은 77.4%로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22.9%)보다 3.37배나 높다.
[신용 잃은 신용평가사] 불신받는 A등급…회사채 발행 엄두도 못내는 곳이 절반
○“A등급 절반이 채권 발행 못해”

국내 3대 신용평가사가 기업에 부여한 투자적격등급(BBB등급 이상) 비중은 90.2%다. 기업 10곳 중 9곳은 투자할 만하다는 일종의 ‘품질보증서’를 써준 것이다.

반면 한국신용평가의 대주주인 무디스가 투자적격등급을 준 비중은 51.6%에 불과하다. 국내 신용평가사와 달리 기업 두 곳 중 한 곳은 투자 위험이 극히 큰 ‘정크본드(투기등급)’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장에서는 국내 신용평가사가 제시하는 신용등급이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연기금 보험사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AA등급 이상의 우량 채권에만 투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투자적격등급에 들어가는 BBB등급은 물론 A등급도 상당수 거품이 끼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대형 증권사 회사채 발행 담당 임원은 “건설·해운 등 실적이 악화한 회사나 재무 상태가 상대적으로 안 좋은 대기업 계열사들이 회사채 발행이 안 되는데도 A등급에 속해 있다”며 “전체 A등급 112곳 중 절반가량이 이에 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그러지는 채권시장

강성부 신한금융투자 채권분석팀장은 “등급 정의상 ‘안전하다’는 의미를 가진 A등급마저 시장에서 소화가 안 되는 것은 그만큼 투자자들의 불신이 크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기관투자가들은 소위 ‘내부 등급’을 만들어 쓰고 있다. 한 대형 생명보험사 운용 담당 임원은 “법에 의해 부여되는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은 시장에선 단순 참고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전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 신용평가사 실장은 “A등급 이상 우량 등급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투자심리 악화로 BBB등급 이하 기업들이 채권 발행을 하지 못하면서 평가 자체를 받지 않은 데 따른 것”이라며 “등급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신용 불량’의 신용평가사

채권시장 관계자들은 “이런 불신은 카드 사태 등으로 촉발된 금융시장 불안이 끝난 2004년부터 10년 가까이 누적돼 온 현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2003년 20.3%였던 A등급 비중은 2004년 27.2%로 뛴 뒤 2010년 30.0%로 높아졌다.

한 전직 신용평가사 연구원은 “2000년대 후반에 한 신용평가사가 특정 기업의 등급을 올리면 다른 신용평가사들은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해당 기업은 물론 유사 기업들의 등급도 경쟁적으로 올린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글로벌투자전략팀장은 “신용평가사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업황과 수익성이 추락한 기업들의 등급 하향을 제때 하지 못해 등급 고평가 상태가 상당기간 지속된 경우도 많다”고 했다. 2011년 이후 LIG건설 웅진그룹 STX그룹 등 A등급 기업들이 잇따라 좌초하자 ‘A등급 외면 현상’이 고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하헌형/이상열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