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오! 홍콩
인천시 넓이에 720여만명이 북적대는 홍콩. 세계 금융·서비스 중심지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지만 역사의 궤적은 기구하다. 변방의 조각섬에서 대륙의 군항과 무역기지로, 동서양의 식민지로, 1국2체제 자치구로 숱한 굽이를 지나왔다.

홍콩을 처음 병합한 것은 진시황제였다. 당나라와 송나라 땐 무역항과 해군기지로 활용됐다. 이곳을 처음 밟은 서양인은 1513년 상륙한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한발 빨랐다. 동인도회사가 광둥성 근처에 무역항을 건설하면서 눈독을 들인 뒤 1차 아편전쟁 때 홍콩 섬을 점령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는 주룽(구룡)까지 차지했다. 1898년에는 신행정구역(신계)을 99년간 조차하면서 영역을 확장했다.

국제 자유무역항으로 성장한 홍콩은 2차 세계대전 때(1941년) 일본에 먹혔고 4년 뒤 다시 영국령이 됐다. 1949년 국공내전을 피해 돈과 기술을 가진 중국인이 대거 몰려왔다. 그 덕에 홍콩상하이은행과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일취월장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땐 외자공급원이 됐고 마침내 글로벌 서비스업 중심지와 쇼핑천국으로 부상했다.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자유방임 경제의 사범’이자 ‘소정부 대기업 정책’의 성공 사례였다. 얼마나 부러웠으면 ‘홍콩 간다’ ‘홍콩 보내줄게’라는 말이 유행했을까. 홍콩행은 한때 돈 좀 있는 남자들의 꿈이었다. 가깝고 저렴하고 명품까지 즐비하니 여자 꼬드길 때 이보다 좋은 멘트가 없었다. 나중엔 성적인 의미까지 보태져 더욱 야릇한 표현으로 발전(?)했다.

홍콩 역사엔 얼룩도 많다. 1997년 7월1일 주권반환 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휘청거렸다. 조류인플루엔자에 금융 위기, 사스 파동까지 겹쳤다. ‘우물물이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 구호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영국군과 일본군 주둔지에는 중국군이 들어와 있다.

주권반환 17주년 기념일인 그저께 51만여명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2017년 직선 행정장관 선거에 반중(反中)인사를 배제하려는 중국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최근 ‘홍콩백서’에서 관할권을 강조하자 반중감정도 최고조가 됐다. 톈안먼 사태 때 100만명이 태풍 속에서 시위했던 그들이다. 이젠 ‘중국에도 민주주의를’이라며 베이징을 겨냥하고 있다. 홍콩과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중국이 일본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동안 영유권 문제로 껄끄러운 베트남·필리핀까지 반중전선에 동참한다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