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좀비 국면' 시작됐다…한국 경제 '잃어버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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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승수 지표 작성 이후 최저
금융과 실물 간 연계 강화 필요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금융과 실물 간 연계 강화 필요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우리 경제의 혈액인 돈이 제대로 안 돈다는 말이 들린 지도 꽤 오래됐다. 거듭된 경고와 권고에도 통화당국의 방관자적 자세로 돈맥경화 현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경제의 좀비 국면이 이미 시작됐다’는 우려와 함께 일본식 ‘잃어버린 10년’ 가능성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한 나라 경제에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발부터 썩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넘었지만 우리 경제 내부에서 부유층보다 서민층, 대기업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일수록 어려움을 호소하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 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활력지표로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를 꼽는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의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돈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통화유통속도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화승수는 한국은행이 이 지표를 처음 발표한 2001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5월 통화승수는 19.4배로, 마침내 20배 밑으로 추락했다. 그만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이 늘어나 시중에서 돈이 퇴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통화유통속도도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연초에 반짝 회복세를 보인 통화유통속도는 5월엔 0.754대로 재추락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경제활력지표인 예금회전율과 요구불예금회전율도 5월에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미국 등 각국이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살아나면서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돈맥경화’ 현상이 심해지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가계는 더 이상 빚을 내서 소비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도 설비투자를 꺼리는 성향이 여전하다. 서민층과 중소기업들이 체감하는 금융사의 대출태도가 더 깐깐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돈이 안 돌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좀비론’이다. 모든 정책은 정책당국이 의도한 대로 정책 수용층이 반응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책당국의 주도력과 함께 경제활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 최근처럼 경제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정책당국이 제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정책 수용층의 반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화(Japanization)’ 우려 등 각종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거론되는 위기설의 실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살 ‘성장대안 부재론’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엔저로 일본이 부상하고 중국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 그것이다.
경제활력이 떨어질 때 정책당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정책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으니 그대로 손놓고 있는 경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책당국이 나서서 떨어지는 경제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다. 지금까지 한은 등이 보여온 태도는 어느 편에 속할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뭄이 심해져 깊어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때맞춰 펌프질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6년 전 미국은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를 당해 깊은 나락으로 추락만 하던 경제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서너 단계씩 인하하는 ‘빅 스텝(big step) 금리 인하’와 ‘헬리콥터 벤’ 식 돈 푸는 정책을 추진했다.
유럽과 일본도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취임 이후 성장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일본도 아베 신조 정부가 출범한 이후 발권력을 동원한 엔저 정책으로 오랜만에 경제활력을 되찾는 분위기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정책당국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특히 한은이 그렇다. 둑(금리)도 낮추고 물(유동성)도 충분히 공급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판 오퍼레이션 정책(단기채 매도·장기채 매입)’도 필요하다. 도덕적 설득을 통해 기업 및 국민의 의견과 협조를 구해야 한다. 독립성과 자존심 싸움을 해서는 안되는 때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 나라 경제에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발부터 썩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넘었지만 우리 경제 내부에서 부유층보다 서민층, 대기업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일수록 어려움을 호소하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 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활력지표로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를 꼽는다.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의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돈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통화유통속도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화승수는 한국은행이 이 지표를 처음 발표한 2001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5월 통화승수는 19.4배로, 마침내 20배 밑으로 추락했다. 그만큼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이 늘어나 시중에서 돈이 퇴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통화유통속도도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연초에 반짝 회복세를 보인 통화유통속도는 5월엔 0.754대로 재추락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경제활력지표인 예금회전율과 요구불예금회전율도 5월에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미국 등 각국이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살아나면서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돈맥경화’ 현상이 심해지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가계는 더 이상 빚을 내서 소비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도 설비투자를 꺼리는 성향이 여전하다. 서민층과 중소기업들이 체감하는 금융사의 대출태도가 더 깐깐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돈이 안 돌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좀비론’이다. 모든 정책은 정책당국이 의도한 대로 정책 수용층이 반응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책당국의 주도력과 함께 경제활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 최근처럼 경제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정책당국이 제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정책 수용층의 반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화(Japanization)’ 우려 등 각종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거론되는 위기설의 실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살 ‘성장대안 부재론’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엔저로 일본이 부상하고 중국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 그것이다.
경제활력이 떨어질 때 정책당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정책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으니 그대로 손놓고 있는 경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책당국이 나서서 떨어지는 경제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다. 지금까지 한은 등이 보여온 태도는 어느 편에 속할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뭄이 심해져 깊어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때맞춰 펌프질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6년 전 미국은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를 당해 깊은 나락으로 추락만 하던 경제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서너 단계씩 인하하는 ‘빅 스텝(big step) 금리 인하’와 ‘헬리콥터 벤’ 식 돈 푸는 정책을 추진했다.
유럽과 일본도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취임 이후 성장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일본도 아베 신조 정부가 출범한 이후 발권력을 동원한 엔저 정책으로 오랜만에 경제활력을 되찾는 분위기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정책당국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특히 한은이 그렇다. 둑(금리)도 낮추고 물(유동성)도 충분히 공급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판 오퍼레이션 정책(단기채 매도·장기채 매입)’도 필요하다. 도덕적 설득을 통해 기업 및 국민의 의견과 협조를 구해야 한다. 독립성과 자존심 싸움을 해서는 안되는 때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