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찬란한 문화의 나라 - 경제·국방 '빵점'…조선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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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이순신에게서 배운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살던 조선(1392~1910)은 어떤 나라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천지에 낮과 밤이 있듯이 조선에도 명암이 존재한다. 삼봉 정도전과 태조 이성계가 건국했던 조선. 충무공 이순신이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고, 율곡 이이와 서애 류성룡이 동분서주하며 재건하려 했던 조선. 전반전의 조선과 후반전의 조선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율곡과 서애가 진단한 조선을 들여다보자.
이이 “조선은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
이이(1536~1584)는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이 잇따라 발발하기 8년 전에 별세했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선조 임금(1552~1608)에게 상소문을 연이어 올렸다.
그는 상소문 ‘만언봉사’에서 조선을 이렇게 비유했다. “조선은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율곡은 ‘육조계’에서 한번 더 썼다.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이 얼마나 참담한 상태였기에, 신하가 감히 임금에게 이렇게 도발했을까. 율곡이 죽은 뒤 조선의 수도 한양은 20여일 만에, 전 국토는 60여일 만에 왜군에 유린당했다.
서애 “하늘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 이순신을 발탁했다. 이 대목을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의 저자 송복 선생님은 조선 최고의 만남, 천운의 만남이라고 규정했다. 변방을 전전하던 44세의 이순신을 알아본 류성룡은 그를 말단직 정읍현감에서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로 7단계나 수직승진시켰다. 육군 출신인 그를 수군장수로 바꾼 운명적 ‘신의 한 수’였다.
선조가 명나라로 건너가 살자고 할 때 류성룡은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고 떠나시면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라고 간했다. 이순신도 “임금과 신하가 우리 땅에서 다 함께 죽어야 한다”며 뜻을 같이 했다. 류성룡이 파직된 날 이순신 장군도 전사했다. 류성룡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통탄했다. “하늘은 어쩌라고 순신에게 그 뛰어난 재주와 능력, 인격은 주었으면서 생명은 더 주지 않았던가.”
류성룡은 파직된 후 쓴 ‘징비록’에서 또이렇게 울었다.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이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혀야 했는가” “임진의 화는 참혹하였도다. 20여일 사이에 3도가 떨어지고 8도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했다. 그러고도 오늘 우리가 있음은 하늘이 도와서다.” 그는 수도 없이 ‘하늘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를 반복해 썼다.
찬란한 문화 뒤 허약했던 조선
나랏일은 크게 문무(文武)로 나뉜다. 당시 조선은 문만 있었고, 무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만 해도 왜국을 아우를만한 힘이 있었다. 삼남 지방에 출범하는 왜적 떼를 쳐부수고,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을 복속시키기도 했다. ‘백성이 곧 하늘이다’는 유학의 기치 아래 유학 선비와 신하들이 임금에게 시도 때도 없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간언을 하는 언로의 나라였다. 사초를 기록하는 선비는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적어 후세에 전했던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 세종은 세계 최초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고, 문자제조 원리를 기록한 훈민정음해례본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문화사에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유산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100년, 200년이 흐르면서 문약해졌다. 전쟁이 없자 유학과 명나라 떠받들기에만 빠졌다. 국방과 경제력 강화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사이 왜국(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췄다. 명나라가 두려워할 정도로 왜국은 성장해 있었다.
조선에는 군대다운 군대가 없었다. 정부군을 갖출만한 경제력이 없었던 탓이다. 당시 국부(國富)는 곧 군량이었다. 류성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1만명이 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아, 곡식 1만석만 있다면, 적게나마 수천 석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오늘의 걱정은 군사 없는데 있지 않고 식량 없는데 있다’고 울부짖었다. 군마(軍馬)가 먹을 사료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군 조직도 엉망이었다. 장교는 많고 사병이 없는데 놀란 류성룡은 ‘10마리양에 9명의 목동이 있는 셈’이라고 했다. 장수에게 녹봉도 못 줬다. 녹봉을 못받으니 장군들이 병졸들을 수탈했다.
무기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주무기는 몽둥이와 죽창이었다. 활이 있었으나 왜의 조총에 상대가 못됐다. 장부상 군사의 수는 4만명으로 돼 있었으나 현역군인은 8000명이 채 안됐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명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순신의 혁혁한 공로를 두고도 선조는 “약간 두드러질 뿐”이라고 폄하했다. 류성룡은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망한다’면서 자강(自彊)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국력을 키우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일본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 우리는 왜 징비록(懲毖綠)을 가르치지 않나
영화 ‘명량’이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영화의 영향으로 이순신과 임진왜란이 재조명받고 있다. 임진왜란 문서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난중일기보다 더 자세하고 입체적으로 임진왜란을 기록한 문서가 있다. 바로 징비록(사진)이다. ‘징비’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미래를 위해 눈물로 쓴 문서다. 그는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전쟁의 모습을 벼슬에서 물러난 뒤 상세하게 남겼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다양한 면에서 보여준다.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일본에 점령당한 이유, 전쟁으로 피폐해진 생활상, 무능한 조선을 통렬하게 썼다.
인물과 관련된 사건은 간단하게 언급된다. 하지만 이순신에 대한 묘사는 활약상, 백의종군, 전사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류성룡이었기에 이순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이라 추정된다. 왜란 전 류성룡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수직 승진시킨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승전이라는 성공적 결과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징비’라는 제목이 달린 이유다. 훗날 숙종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우려해 일본 수출을 금한 적도 있다. 저자인 류성룡은 징비록을 두고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권대겸 인턴기자 eogur1079@naver.com
이이 “조선은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
이이(1536~1584)는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이 잇따라 발발하기 8년 전에 별세했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선조 임금(1552~1608)에게 상소문을 연이어 올렸다.
그는 상소문 ‘만언봉사’에서 조선을 이렇게 비유했다. “조선은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율곡은 ‘육조계’에서 한번 더 썼다.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이 얼마나 참담한 상태였기에, 신하가 감히 임금에게 이렇게 도발했을까. 율곡이 죽은 뒤 조선의 수도 한양은 20여일 만에, 전 국토는 60여일 만에 왜군에 유린당했다.
서애 “하늘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 이순신을 발탁했다. 이 대목을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의 저자 송복 선생님은 조선 최고의 만남, 천운의 만남이라고 규정했다. 변방을 전전하던 44세의 이순신을 알아본 류성룡은 그를 말단직 정읍현감에서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로 7단계나 수직승진시켰다. 육군 출신인 그를 수군장수로 바꾼 운명적 ‘신의 한 수’였다.
선조가 명나라로 건너가 살자고 할 때 류성룡은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고 떠나시면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라고 간했다. 이순신도 “임금과 신하가 우리 땅에서 다 함께 죽어야 한다”며 뜻을 같이 했다. 류성룡이 파직된 날 이순신 장군도 전사했다. 류성룡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통탄했다. “하늘은 어쩌라고 순신에게 그 뛰어난 재주와 능력, 인격은 주었으면서 생명은 더 주지 않았던가.”
류성룡은 파직된 후 쓴 ‘징비록’에서 또이렇게 울었다.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이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혀야 했는가” “임진의 화는 참혹하였도다. 20여일 사이에 3도가 떨어지고 8도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했다. 그러고도 오늘 우리가 있음은 하늘이 도와서다.” 그는 수도 없이 ‘하늘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를 반복해 썼다.
찬란한 문화 뒤 허약했던 조선
나랏일은 크게 문무(文武)로 나뉜다. 당시 조선은 문만 있었고, 무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만 해도 왜국을 아우를만한 힘이 있었다. 삼남 지방에 출범하는 왜적 떼를 쳐부수고,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을 복속시키기도 했다. ‘백성이 곧 하늘이다’는 유학의 기치 아래 유학 선비와 신하들이 임금에게 시도 때도 없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간언을 하는 언로의 나라였다. 사초를 기록하는 선비는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적어 후세에 전했던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 세종은 세계 최초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고, 문자제조 원리를 기록한 훈민정음해례본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문화사에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유산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100년, 200년이 흐르면서 문약해졌다. 전쟁이 없자 유학과 명나라 떠받들기에만 빠졌다. 국방과 경제력 강화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사이 왜국(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췄다. 명나라가 두려워할 정도로 왜국은 성장해 있었다.
조선에는 군대다운 군대가 없었다. 정부군을 갖출만한 경제력이 없었던 탓이다. 당시 국부(國富)는 곧 군량이었다. 류성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1만명이 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아, 곡식 1만석만 있다면, 적게나마 수천 석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오늘의 걱정은 군사 없는데 있지 않고 식량 없는데 있다’고 울부짖었다. 군마(軍馬)가 먹을 사료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군 조직도 엉망이었다. 장교는 많고 사병이 없는데 놀란 류성룡은 ‘10마리양에 9명의 목동이 있는 셈’이라고 했다. 장수에게 녹봉도 못 줬다. 녹봉을 못받으니 장군들이 병졸들을 수탈했다.
무기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주무기는 몽둥이와 죽창이었다. 활이 있었으나 왜의 조총에 상대가 못됐다. 장부상 군사의 수는 4만명으로 돼 있었으나 현역군인은 8000명이 채 안됐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명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순신의 혁혁한 공로를 두고도 선조는 “약간 두드러질 뿐”이라고 폄하했다. 류성룡은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망한다’면서 자강(自彊)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국력을 키우지 않았고, 결국 또다시 일본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 우리는 왜 징비록(懲毖綠)을 가르치지 않나
영화 ‘명량’이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영화의 영향으로 이순신과 임진왜란이 재조명받고 있다. 임진왜란 문서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난중일기보다 더 자세하고 입체적으로 임진왜란을 기록한 문서가 있다. 바로 징비록(사진)이다. ‘징비’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미래를 위해 눈물로 쓴 문서다. 그는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전쟁의 모습을 벼슬에서 물러난 뒤 상세하게 남겼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다양한 면에서 보여준다.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일본에 점령당한 이유, 전쟁으로 피폐해진 생활상, 무능한 조선을 통렬하게 썼다.
인물과 관련된 사건은 간단하게 언급된다. 하지만 이순신에 대한 묘사는 활약상, 백의종군, 전사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류성룡이었기에 이순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이라 추정된다. 왜란 전 류성룡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수직 승진시킨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승전이라는 성공적 결과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징비’라는 제목이 달린 이유다. 훗날 숙종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우려해 일본 수출을 금한 적도 있다. 저자인 류성룡은 징비록을 두고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권대겸 인턴기자 eogur107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