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관료사회 "퇴직후 갈데도 없는데…승진 반갑지 않아"
중앙 부처에서 근무 중인 K국장은 추석 연휴 기간 고향에서 만난 고교·행정고시 선배로부터 이색적인 얘기를 들었다. 기획재정부 산하청에서 국장으로 퇴직해 로펌이나 회계법인, 대기업 중 한곳에 재취업할 것으로 예상했던 이 선배는 중소기업 20곳의 고문을 맡았다고 했다.

K국장은 “퇴직 공직자가 재취업하는 것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워낙 강해 대기업에는 갈 엄두를 못 내고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선배의 설명이었다”며 “한 달에 한 번가량 들러 대관 업무나 재무·회계 등에 대한 자문에 응하고 월 200만원씩을 받는데 마음이 무척 편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세월호 참사 관련 담화문을 발표한 뒤 퇴직 공직자 취업 제한 대상이 크게 늘어나고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도 금지되면서 관료사회의 풍속도가 변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희망 보직 하향 지원이다. 고위 공무원을 마치면 갈 자리가 마땅치 않아 ‘승진은 일하는 기간 단축’으로 인식되는 데 따른 현상으로 풀이된다. 안전행정부 고위공무원 가급(1급) 중 상당수는 광역지방자치단체 부단체장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 후 산하단체로의 이직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데다 국가안전처 신설로 차관 자리가 하나 줄어 ‘시간 벌기’에 나선 것이다. 안행부 관계자는 “광역 부단체장은 통상 고위공무원 나급(국장 2급)을 마치고 1급으로 승진하면서 가던 자리”라며 “현직 1급이 부단체장을 희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차관급 정무직으로 중앙 부처에 복직할 것으로 예상됐던 박동훈 청와대 지방자치비서관이 최근 안행부 한직 1급 자리인 국가기록원장에 내정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전직 안행부 고위 관계자는 “정년을 보장받기 힘든 정무직으로 승진하느니 1급으로 수평 이동해 공직 기간을 늘리겠다는 포석”으로 분석했다. 산하기관이나 단체가 거의 없어 인사 숨통 틔우기 차원에서 ‘부처장 승진 1년 후 퇴직’이라는 내부 인사 원칙을 갖고 있는 일부 부처에선 승진으로 이어지는 핵심 보직을 피해다니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

제2의 직장을 잡기가 어려워지면서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는 사례도 자취를 감췄다. 기수 문화가 상대적으로 강한 경찰에선 경찰대 2기 출신인 강신명 청장이 취임하면서 고위 간부들의 ‘줄사퇴’가 예상됐으나 그렇지 않았다. 강 청장은 “경찰에서 퇴직하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선배 경찰 간부들은 아직도 가족들이 딸려 있어 생활을 계속 해야 한다는 점을 좀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용퇴 후 산하단체 이직’이라는 연결 고리가 끊기면서 임기가 끝난 각 부처 산하단체장에는 내부 승진, 교수, 정치인 등의 인사 하마평이 잇따르고 있다.

공무원시험을 주관하는 안행부에선 ‘행시보다 7급 공채’라는 말이 유행이다. 행정고시와 승진 경쟁을 통해 고위직에 오르고도 많지 않은 나이에 앞날을 걱정하느니 7급으로 입문해 공직 생활을 길게 하는 게 낫다는 의미다. 안행부 관계자에 따르면 행시 합격 후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하면 1급에 오르기까지 25년가량 걸린다. 20대 후반에 합격했다면 50대 초·중반 1급으로 승진하고 이후 차관 등 정무직에 오르지 못하면 안팎에서 사퇴 압력을 받는다. 반면 7급으로 출발하면 1급까지 오를 경우 37년, 2급까지는 30여년 걸린다. 퇴직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7급 공채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부 공직자들은 그동안의 경험칙을 토대로 ‘3년만’을 외치기도 한다. 중앙부처 한 고위공무원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공직사회 개혁이 화두가 됐지만 시간이 흐르면 각종 공약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공무원들을 예우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공직자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 누그러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박기호 선임기자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