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2013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3 북한의 주요 통계지표(2012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국민총소득(GNI)은 1279조5000억원으로 북한의 33조4790억원보다 38.2배나 많다. 1인당 총소득은 한국이 2559만원(약 2만3916달러), 북한은 137만원(약 1280달러)로 18.7배 차이가 났다. 인구는 한국이 5400만명, 북한은 2442만명으로 한국이 두 배나 된다. 이 밖에 자동차 생산량, 조선 건조량, 압연강재 생산량, 선박 보유수 등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월등해 적게는 100배, 많게는 1000배까지도 차이가 났다. 에너지 소비량 역시 10배 이상 차이를 보였고 영유아 사망률, 5세 미만 사망률에서 10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분단 60년…자유시장 지킨 한국의 경제력, 계획경제 北의 38배
이런 통계보다도 한국이 북한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은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넘어오는 탈북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자 수는 2만6000여명에 이른다. 몸으로 직접 선택하는 것만큼 분명하고 극적인 지표는 없다.

사실 광복 후 분단될 당시 경제적인 여건에서는 북한이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압록강에 건설된 동양 최대 수력발전소인 수풍댐이 있었고, 일제가 함경남도 일대에 건설한 세계적인 규모의 화학생산기지가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도 북한이 남한보다 높았다. 1961년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124달러로 한국의 82달러보다 높았다. 이런 사정이 1973년까지 지속되다가 1974년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521달러, 한국이 588달러로 앞서기 시작했다. 그 후 반세기 만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서는 부유한 국가가 됐고, 2012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 무역 규모 1조675억달러로 세계 8위, 외환보유액 3450억달러로 세계 7위권 국가로 성장했다. 또 LCD패널·TV·조선·휴대폰은 세계 1위, 반도체는 2위, 자동차는 5위의 생산국이 된 것이다.

분단 60년…자유시장 지킨 한국의 경제력, 계획경제 北의 38배
이런 한국 경제에 대해 201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사전트는 “한국의 역사와 경제는 기적 그 자체”,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역사에 기록된 것 가운데 6·25전쟁 후 4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극찬했다. 기 소르망 파리정치대 교수는 “한국의 경제 발전사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까지 평가했다.

한국과 북한 간에 엄청난 경제력 차이가 나는 연유에 대해서 체제 차이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보통 주류 경제사학자들은 국가 간 경제력 차이는 지리적 위치나 자연환경에 따른 문화, 사회규범, 가치와 노동윤리 등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분단 당시 민족, 언어, 문화, 지리적 여건 등 모든 면에서 동일했다. 다른 점은 단 하나 남쪽의 한국은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했고, 북한은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경제행위가 시장이 아닌 국가에 의해 수행되는 철저한 공산주의체제를 선택했다는 것뿐이었다.

남한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유지 발전시킨 데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부는 사유재산 확보, 기회균등 제공, 사기업체제 등을 마련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그런 기반 위에 박정희 정부가 사유재산권을 더욱 보장하고 경쟁을 도입하며 시장경제체제를 강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국민들은 열심히 일했고, 저축하며 자본을 축적했으며, 기술을 발전시켰다. 기업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투철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척박한 자동차 산업과 조선업에 도전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현대의 정주영, 국수 생산에서 시작해 오늘날 세계 제일의 전자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등과 같은 기업가들이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반면 북한은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해 무상으로 배분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생산시설을 국유화하며 생산시설마다 생산목표치를 할당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실시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승만 정부 시기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북한과는 달랐다.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상몰수와 유상분배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지만,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재산은 개인의 자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가가 모든 자원을 소유하고 있으면 개인은 국가의 강제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으면 직업의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통한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자본을 축적할 유인이 없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연히 이런 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지지 않고 기술 개발이 이뤄지지 않으며 정체와 후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재산권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사회주의체제로 간 북한의 지난 60여년 동안의 역사가 그랬다.

한국과 북한의 역사는 어떤 사회가 풍요롭고 인간적이며 살기 좋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를 보장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간 나라들은 다 번영을 이루고 풍요로움을 누리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간 국가들은 곤경을 겪거나 몰락했다. 한국과 북한의 역사는 그 표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
‘지주-소작농’ 틀 깬 농지개혁, 한국歷史 ‘변곡점’

사유재산 강화…경제발전 이뤄
규제개혁으로 ‘제2 농지개혁’을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민이었고, 그중 80%가 소작농이었다. 이 대통령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지주와 소작인의 지배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제대로 건국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건국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농지개혁의 성공으로 국민 대부분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유재산을 갖게 됐다. 사유재산으로 땅을 가진 농민들은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고, 누구나 노력하면 부를 이룰 수 있는 사회가 됐다. 또 지주-소작인의 지배구조가 사라지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계급 갈등을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위한 외환 및 수입규제 등과 같은 정책이 많았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출 증대를 위한 과감한 규제완화와 조세 감면, 그리고 기업들을 국제경쟁에 노출시키는 등 시장친화적인 경제 정책을 수행했다. 이것이 박정희 정부 시절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다.

경제적 반응은 현재 상황에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변화가 나타나는 한계적 반응이다. 경제 발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상황에서 새로운 정책의 성격에 따라서 경제가 발전하든지, 아니면 침체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새로운 경제 정책이 친(親)시장적이면 경제가 발전하고 반(反)시장적이면 경제가 후퇴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시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 정책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 결과 성장 동력이 떨어지면서 지금 한국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져 있다. 한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과감한 규제개혁을 통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다음주(9월20일자)부터는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시각으로 본 사회’ 시리즈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