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사] 후버가 대공황 부른 자유주의자?…루스벨트 뺨친 개입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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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27) 1930년대 대공황 2 : 후버는 자유시장주의자였나
자유주의자 평가받는 후버
재정적자 감수한 개입주의자
소비 부진이 불황 부른다는 생각에
시장의 임금하락 저지…실업자 대거 양산
보호무역법 제정 이어
부실은행에 대거 자금 지원
자유주의자 평가받는 후버
재정적자 감수한 개입주의자
소비 부진이 불황 부른다는 생각에
시장의 임금하락 저지…실업자 대거 양산
보호무역법 제정 이어
부실은행에 대거 자금 지원
아마도 여러분은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미국에서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자유방임정책을 펼쳐 불황의 골을 깊게 했지만, 후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써서 대공황으로부터 미국인을 구출했다고.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후버는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믿는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후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연방정부 안에 두 파, 즉 재무장관 멜론으로 대표되는 부실 청산을 통한 자연치유파, 그리고 자신을 필두로 하는 적극적 개입파로 갈렸다고 한다. 후버는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자신이 주식시장 붕괴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악(惡)을 완화시키고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가와 은행가들을 불러모아 임금을 내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의 이런 임금 지지 노력에는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주의’가 깔려 있다. 그를 포함해 불황이 기본적으로 과소소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 과소소비론자들은 노동자에게 재화를 되살 수 있도록 월급봉투에 돈을 충분히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높은 임금이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다. 인과관계는 그 반대로 흐른다. 높은 생산성이 높은 임금을 가능하게 한다. 생산성을 넘는 임금의 강제는 불가피하게 실업을 야기한다.
대공황기와 그 직전에 있었던 2여년 만에 종료된 1920~1922년의 불황을 비교하면 (실질)임금과 실업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때 당시에는 1년 동안 임금이 20%가량 떨어졌지만 실업률도 빠르게 감소해 정상화됐다. 1921년 11.7%였던 실업률은 다음해 6.7%로 떨어지고, 그 다음해인 1923년에는 2.4%로 하락했다.
이에 비해 후버 집권기인 1931년 당시에는 물가가 8.8% 하락했지만 화폐 임금은 3%도 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 1인당 생산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높아졌다. 그러나 실업률은 1931년 15%를 넘어섰으며 1933년 3월에는 28.3%로 4명 중 적어도 1명 이상이 실업 상태가 되는 등 악화됐다. 베더와 갤러웨이의 지적처럼 이는 근본적으로 1931년의 화폐임금이 물가 하락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하락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노조는 실업을 양산한 후버의 임금지지 정책을 환영했다.
후버는 1000여명의 경제학자가 반대 서명한 성명에도 불구하고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했다. 그는 이를 통해 미국
민을 돕고자 했지만 이 역시 의도한 효과는 내지 못한 채 농민을 비롯한 미국인과 전 세계인의 경제적 어려움만 가중시켰다. 미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혀 달러화를 획득하지 못한 외국인도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를 줄였을 뿐 아니라 외국도 보복관세에 나섰다. 또 부품 수입에 대한 관세 증가로 미국 생산자들은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미국 자동차 판매는 1929년 530만대에서 1932년에는 180만대로 격감했다. 미국의 총수출도 1929년 70억달러에서 1932년 25억달러로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운 영향으로 후버는 적자재정 정책을 취하지 않았고 댐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후버는 작은 정부가 아니라 큰 정부를 지향했다. 그는 큰 폭의 재정적자를 만들어내고 이를 메우기 위해 세금도 크게 올렸다.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연방정부 재정은 약 7억달러로, 당시 연간 세출액 33억달러의 5분의 1 정도의 큰 흑자 수준이었다. 세입이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지만 후버 정부가 세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2 회계연도부터 재정적자는 급증했다. 특히 1930년 대비 1932년 재정지출은 42% 증가했다. 후버는 한 번도 균형재정을 실천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축소판’ 뉴딜정책을 펼쳤다. 1929년 그는 연방정부 건물 공사비에 약 4억달러 이상, 해운위원회를 위한 공공사업으로 약 1억7500만달러의 정부지출을 결의했다. 1930년 7월 국회는 약 9억1500만달러의 공공사업비를 의결했다. 그는 주 정부 차원에서도 공공사업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후버댐, LA 수도교 등의 대형 토목사업이 후버의 작품이다. 후버 재임 4년간 공공사업을 위한 지출은 루스벨트에 비해 작다는 의미에서 축소판 뉴딜이라 불릴 만하지만 실은 후버 이전 30년간의 공공지출보다 많다고 한다. (전용덕,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재평가’)
1930년대 재건금융공사(RFC)를 만들어 초기 5개월간 10억달러를 부실 은행과 철도회사에 빌려주게 한 미국 대통령은 누구일까? 아마 많은 사람은 루스벨트를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후버다. 미국 대공황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인 로스버드의 ‘미국의 대공황’을 읽은 일부 월가 사람들은 후버가 RFC를 만든 것을 보고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시 구제금융정책이 곧 등장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제 후버가 작은 정부를 지향한 자유시장주의자가 아니었음은 명백해졌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정책을 통해 루스벨트의 뉴딜과 마찬가지로 실업과 같은 불황의 골을 만들어 불황을 대공황으로 만들어갔다. 물론 후버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고자 애썼고, 경제에서 민간 주도가 필수적임을 인정했으며, 옛 사회주의 소련이나 파시스트 체제를 본보기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주의자였다.
그의 대통령 주재 회의로부터 우리가 얻는 교훈은 그것이 자칫 부실 제조업체나 금융회사를 세금으로 살려내는 자리, 임금을 시장에서보다 높게 주기로 약속하는 자리가 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규제 혁파’를 내세운 회의도 자칫 보조금을 요구하는 자리로 변질될 수 있다. 시장의 결정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장을 이길 정부는 없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
후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연방정부 안에 두 파, 즉 재무장관 멜론으로 대표되는 부실 청산을 통한 자연치유파, 그리고 자신을 필두로 하는 적극적 개입파로 갈렸다고 한다. 후버는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자신이 주식시장 붕괴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악(惡)을 완화시키고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가와 은행가들을 불러모아 임금을 내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의 이런 임금 지지 노력에는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주의’가 깔려 있다. 그를 포함해 불황이 기본적으로 과소소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 과소소비론자들은 노동자에게 재화를 되살 수 있도록 월급봉투에 돈을 충분히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높은 임금이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다. 인과관계는 그 반대로 흐른다. 높은 생산성이 높은 임금을 가능하게 한다. 생산성을 넘는 임금의 강제는 불가피하게 실업을 야기한다.
대공황기와 그 직전에 있었던 2여년 만에 종료된 1920~1922년의 불황을 비교하면 (실질)임금과 실업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때 당시에는 1년 동안 임금이 20%가량 떨어졌지만 실업률도 빠르게 감소해 정상화됐다. 1921년 11.7%였던 실업률은 다음해 6.7%로 떨어지고, 그 다음해인 1923년에는 2.4%로 하락했다.
이에 비해 후버 집권기인 1931년 당시에는 물가가 8.8% 하락했지만 화폐 임금은 3%도 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 1인당 생산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높아졌다. 그러나 실업률은 1931년 15%를 넘어섰으며 1933년 3월에는 28.3%로 4명 중 적어도 1명 이상이 실업 상태가 되는 등 악화됐다. 베더와 갤러웨이의 지적처럼 이는 근본적으로 1931년의 화폐임금이 물가 하락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하락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노조는 실업을 양산한 후버의 임금지지 정책을 환영했다.
후버는 1000여명의 경제학자가 반대 서명한 성명에도 불구하고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했다. 그는 이를 통해 미국
민을 돕고자 했지만 이 역시 의도한 효과는 내지 못한 채 농민을 비롯한 미국인과 전 세계인의 경제적 어려움만 가중시켰다. 미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혀 달러화를 획득하지 못한 외국인도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를 줄였을 뿐 아니라 외국도 보복관세에 나섰다. 또 부품 수입에 대한 관세 증가로 미국 생산자들은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미국 자동차 판매는 1929년 530만대에서 1932년에는 180만대로 격감했다. 미국의 총수출도 1929년 70억달러에서 1932년 25억달러로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운 영향으로 후버는 적자재정 정책을 취하지 않았고 댐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후버는 작은 정부가 아니라 큰 정부를 지향했다. 그는 큰 폭의 재정적자를 만들어내고 이를 메우기 위해 세금도 크게 올렸다.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연방정부 재정은 약 7억달러로, 당시 연간 세출액 33억달러의 5분의 1 정도의 큰 흑자 수준이었다. 세입이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지만 후버 정부가 세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2 회계연도부터 재정적자는 급증했다. 특히 1930년 대비 1932년 재정지출은 42% 증가했다. 후버는 한 번도 균형재정을 실천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축소판’ 뉴딜정책을 펼쳤다. 1929년 그는 연방정부 건물 공사비에 약 4억달러 이상, 해운위원회를 위한 공공사업으로 약 1억7500만달러의 정부지출을 결의했다. 1930년 7월 국회는 약 9억1500만달러의 공공사업비를 의결했다. 그는 주 정부 차원에서도 공공사업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후버댐, LA 수도교 등의 대형 토목사업이 후버의 작품이다. 후버 재임 4년간 공공사업을 위한 지출은 루스벨트에 비해 작다는 의미에서 축소판 뉴딜이라 불릴 만하지만 실은 후버 이전 30년간의 공공지출보다 많다고 한다. (전용덕,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재평가’)
1930년대 재건금융공사(RFC)를 만들어 초기 5개월간 10억달러를 부실 은행과 철도회사에 빌려주게 한 미국 대통령은 누구일까? 아마 많은 사람은 루스벨트를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후버다. 미국 대공황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인 로스버드의 ‘미국의 대공황’을 읽은 일부 월가 사람들은 후버가 RFC를 만든 것을 보고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시 구제금융정책이 곧 등장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제 후버가 작은 정부를 지향한 자유시장주의자가 아니었음은 명백해졌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정책을 통해 루스벨트의 뉴딜과 마찬가지로 실업과 같은 불황의 골을 만들어 불황을 대공황으로 만들어갔다. 물론 후버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고자 애썼고, 경제에서 민간 주도가 필수적임을 인정했으며, 옛 사회주의 소련이나 파시스트 체제를 본보기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주의자였다.
그의 대통령 주재 회의로부터 우리가 얻는 교훈은 그것이 자칫 부실 제조업체나 금융회사를 세금으로 살려내는 자리, 임금을 시장에서보다 높게 주기로 약속하는 자리가 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규제 혁파’를 내세운 회의도 자칫 보조금을 요구하는 자리로 변질될 수 있다. 시장의 결정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장을 이길 정부는 없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