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7) 새로운 영리기회의 출현과 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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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은 분명히 심각한 위기였다. 값싼 면제품의 수입으로 재래 면업이 타격을 입었고, 쌀 수출로 쌀값이 올라 쌀을 사 먹던 사람들은 생계가 어려워졌다. 국가에 공물을 납부하던 공인들도 물가 상승으로 손해를 보았으며, 외국 상인들이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 시전상인의 특권이 위태로워졌다(26회 참조).
그렇지만 개항기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해 경제가 악화되기만 하였던 시기라고 이해한다면 너무 일면적이다. 개항은 경제적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상대가격과 제도를 변화시켜 개항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영리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농민 중에도 재산을 모아 대지주로 성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중농(中農)에 불과하였던 김성수 가문이 1909년에 1200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 성장하였던 것도 쌀 수출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회사 출현했으나 대개 단명으로 끝나
더 큰 변화는 ‘객주상회사’를 비롯한 ‘회사’라는 새로운 경제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회사’는 상법에 “상행위 기타 영리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한 사단(社團)”이며 “법인(法人)”이라고 규정하고 있듯이 영리활동을 위해서 조직한 법인이다. 회사가 일반적인 모임과 다른 점은 법률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어 구성원이 교체되어도 그와 무관하게 영속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는 자본 규모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거나 사업이 너무 위험하여 자본과 위험을 분담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영리기회에 대한 지식과 경영능력이 있지만 자본이 부족할 때 자본을 모으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려면 경영을 잘하여 최소한 파산을 면해야겠지만, 회사의 공적인 회계와 경영자의 사적인 가계가 명확히 구별되고 회계장부가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관계자 간에 신뢰가 보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회사가 외부의 권력과 폭력, 그리고 횡령이나 배임과 같은 내부의 부정행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단기간에 이러한 조건을 갖추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개항기에 설립된 회사들은 거의 모두 단명하였으며 ‘회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회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현직의 관료들이 회사 설립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개항기 회사의 특징이다. 사업기회를 얻고 외부의 침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관료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으며 회사 관련 지식이 민간에 전파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개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883년 무렵부터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에 ‘회사설’(會社說)이 게재되어 회사를 소개하고 설립을 권장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설립한 관영회사가 많았지만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장에서 객주들이 설립한 ‘객주상회사’를 비롯하여 민간 회사들도 속속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객주상회사, 개항장 객주영업 독점
객주상회사는 객주로부터 가입비를 받고 회사에 속된 객주에게만 영업을 허가하였다. 객주들은 타인의 상품을 위탁받아 판매를 대행해주는 대가로 물건 값의 1/10을 ‘구문’(수수료)으로 받고 그 중에 일부를 회사에 납부하였다. 객주상회사가 개항장의 객주영업을 독점한 것은 통리기무아문이나 내장원과 같은 관청에 영업세를 상납하는 대가로 권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896년에 인천 객주들이 설립한 신상회사(紳商會社)는 종친(청안군 이재순)을 임명하고 매년 2000원을 내장원(왕실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에 상납하였는데, 경쟁자를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객주상회사 외에도 상업, 운수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매년 회사가 설립된 숫자를 살펴보면 계단 모양을 보이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그래프). 회사 설립이 정치체제의 변동이나 제도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883년에 18개사가 설립된 후에 감소하였다가 갑오개혁 기간인 1895년에 12개사, 1896년에 16개사로 증가한 후에 10개사 수준을 유지하였다. 대한제국이 확립되는 1899년에는 40개사가 설립되어 회사 설립이 크게 증가한 후에 감소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 상태로 전락한 다음에도 회사 설립은 다시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1905년에는 44개사, 1906년에 81개사가 설립된 후에 이러한 기조가 1910년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회사가 주로 어느 분야에서 설립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상업과 같은 유통부문의 비중이 높았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이 확인되는 717개 회사의 업종은 비중이 큰 순서부터 상업 30.3%, 제조업·광업 19.8%, 운수업 11.2%, 농림업 7.9%, 금융업 6.6%, 청부 토건업 5.3%, 수산업 3.1%, 기타 15.9%의 순서였다. 이러한 업종 분포는 개항기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세금 대신 걷는 조세청부회사도 등장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회사 설립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가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사 중에 ‘도고회사’(都賈會社), ‘수세회사’(收稅會社)라고 하여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회사 이미지와는 다른 경우도 많았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에 권력을 배경으로 어떤 물건의 매매를 독점하거나 매점매석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도고’(都賈)라고 불렀는데, 개항 후에도 이와 유사한 회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선박이 왕래하는 항구나 포구에서 화물이나 선박에 징세하여 그 일부를 관청에 상납하는 조세청부업이 주 업무였다. 특정 상품의 생산이나 판매를 독점하고 징세하는 회사도 있었다. 누룩을 독점하여 위반자로부터 조세를 거두었던 국자회사(子會社)가 좋은 예다. 회사 설립을 허가받는 것을 독점권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회사만 설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1886년에 설립된 대흥회사(大興會社)는 외국 기선을 구입하여 연안 해운업을 시도하였으며, 1896년에 함경북도 경성에서 설립된 천일회사(天一會社)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함경도 특산물인 한우와 연맥(燕麥)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수출하고 금건(金巾) 따위의 면직물을 수입하는 것이 주된 영업이었다. 1896년 이후부터는 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중앙은행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였지만, 일반 민간은행으로 1896년에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설립된 이후 대한은행(1898), 대한천일은행(1899)이 설립되었다. 특히 대한천일은행은 1912년에 조선상업은행으로, 1950년에는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사진). 제조업 분야 특히 면방직 분야에서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면제품 수입에 대한 대응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1901년에 설립된 한성제직회사는 60여대의 역직기를 도입, 수입 방적사를 이용하여 하루 70~80자의 직물을 생산하였다. 1898년에 설립된 부하(釜下)철도회사와 같이 철도부설을 목적으로 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장기간 존속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지만 분명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국가가 회사를 설립하거나 전현직 관료들이 회사설립에 대거 참여하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일반 상공인들의 참여가 증가해갔다.
회사설립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습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경제제도에 사회가 적응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를 목도함으로써 자기 나라를 개혁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재호 교수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
그렇지만 개항기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해 경제가 악화되기만 하였던 시기라고 이해한다면 너무 일면적이다. 개항은 경제적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상대가격과 제도를 변화시켜 개항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영리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농민 중에도 재산을 모아 대지주로 성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중농(中農)에 불과하였던 김성수 가문이 1909년에 1200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 성장하였던 것도 쌀 수출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회사 출현했으나 대개 단명으로 끝나
더 큰 변화는 ‘객주상회사’를 비롯한 ‘회사’라는 새로운 경제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회사’는 상법에 “상행위 기타 영리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한 사단(社團)”이며 “법인(法人)”이라고 규정하고 있듯이 영리활동을 위해서 조직한 법인이다. 회사가 일반적인 모임과 다른 점은 법률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어 구성원이 교체되어도 그와 무관하게 영속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는 자본 규모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거나 사업이 너무 위험하여 자본과 위험을 분담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영리기회에 대한 지식과 경영능력이 있지만 자본이 부족할 때 자본을 모으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려면 경영을 잘하여 최소한 파산을 면해야겠지만, 회사의 공적인 회계와 경영자의 사적인 가계가 명확히 구별되고 회계장부가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관계자 간에 신뢰가 보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회사가 외부의 권력과 폭력, 그리고 횡령이나 배임과 같은 내부의 부정행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단기간에 이러한 조건을 갖추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개항기에 설립된 회사들은 거의 모두 단명하였으며 ‘회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회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현직의 관료들이 회사 설립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개항기 회사의 특징이다. 사업기회를 얻고 외부의 침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관료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으며 회사 관련 지식이 민간에 전파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개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883년 무렵부터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에 ‘회사설’(會社說)이 게재되어 회사를 소개하고 설립을 권장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설립한 관영회사가 많았지만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장에서 객주들이 설립한 ‘객주상회사’를 비롯하여 민간 회사들도 속속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객주상회사, 개항장 객주영업 독점
객주상회사는 객주로부터 가입비를 받고 회사에 속된 객주에게만 영업을 허가하였다. 객주들은 타인의 상품을 위탁받아 판매를 대행해주는 대가로 물건 값의 1/10을 ‘구문’(수수료)으로 받고 그 중에 일부를 회사에 납부하였다. 객주상회사가 개항장의 객주영업을 독점한 것은 통리기무아문이나 내장원과 같은 관청에 영업세를 상납하는 대가로 권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896년에 인천 객주들이 설립한 신상회사(紳商會社)는 종친(청안군 이재순)을 임명하고 매년 2000원을 내장원(왕실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에 상납하였는데, 경쟁자를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객주상회사 외에도 상업, 운수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매년 회사가 설립된 숫자를 살펴보면 계단 모양을 보이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그래프). 회사 설립이 정치체제의 변동이나 제도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883년에 18개사가 설립된 후에 감소하였다가 갑오개혁 기간인 1895년에 12개사, 1896년에 16개사로 증가한 후에 10개사 수준을 유지하였다. 대한제국이 확립되는 1899년에는 40개사가 설립되어 회사 설립이 크게 증가한 후에 감소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 상태로 전락한 다음에도 회사 설립은 다시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1905년에는 44개사, 1906년에 81개사가 설립된 후에 이러한 기조가 1910년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회사가 주로 어느 분야에서 설립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상업과 같은 유통부문의 비중이 높았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이 확인되는 717개 회사의 업종은 비중이 큰 순서부터 상업 30.3%, 제조업·광업 19.8%, 운수업 11.2%, 농림업 7.9%, 금융업 6.6%, 청부 토건업 5.3%, 수산업 3.1%, 기타 15.9%의 순서였다. 이러한 업종 분포는 개항기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세금 대신 걷는 조세청부회사도 등장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회사 설립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가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사 중에 ‘도고회사’(都賈會社), ‘수세회사’(收稅會社)라고 하여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회사 이미지와는 다른 경우도 많았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에 권력을 배경으로 어떤 물건의 매매를 독점하거나 매점매석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도고’(都賈)라고 불렀는데, 개항 후에도 이와 유사한 회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선박이 왕래하는 항구나 포구에서 화물이나 선박에 징세하여 그 일부를 관청에 상납하는 조세청부업이 주 업무였다. 특정 상품의 생산이나 판매를 독점하고 징세하는 회사도 있었다. 누룩을 독점하여 위반자로부터 조세를 거두었던 국자회사(子會社)가 좋은 예다. 회사 설립을 허가받는 것을 독점권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회사만 설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1886년에 설립된 대흥회사(大興會社)는 외국 기선을 구입하여 연안 해운업을 시도하였으며, 1896년에 함경북도 경성에서 설립된 천일회사(天一會社)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함경도 특산물인 한우와 연맥(燕麥)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수출하고 금건(金巾) 따위의 면직물을 수입하는 것이 주된 영업이었다. 1896년 이후부터는 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중앙은행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였지만, 일반 민간은행으로 1896년에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설립된 이후 대한은행(1898), 대한천일은행(1899)이 설립되었다. 특히 대한천일은행은 1912년에 조선상업은행으로, 1950년에는 한국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사진). 제조업 분야 특히 면방직 분야에서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면제품 수입에 대한 대응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1901년에 설립된 한성제직회사는 60여대의 역직기를 도입, 수입 방적사를 이용하여 하루 70~80자의 직물을 생산하였다. 1898년에 설립된 부하(釜下)철도회사와 같이 철도부설을 목적으로 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장기간 존속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지만 분명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국가가 회사를 설립하거나 전현직 관료들이 회사설립에 대거 참여하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일반 상공인들의 참여가 증가해갔다.
회사설립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습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경제제도에 사회가 적응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를 목도함으로써 자기 나라를 개혁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재호 교수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