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31) 일본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였는가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전쟁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10월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사실상 ‘재정감독’이 돼 대한제국의 재정운영을 철두철미 감독하고 재정제도 전반을 개편했다. 1907년 7월의 제3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에는 재정고문이 해임되고 탁지부에 차관을 비롯한 일본인 관리가 임명돼 통감 지휘 아래 대한제국 재정을 직접 관장했다.

재정고문과 통감에 의해 이뤄진 대한제국의 재정제도 개편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1)일본의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승격시켜 국고를 맡기는 한편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새 화폐를 기존의 동전 및 백동화와 교환해 대한제국의 법화로 만들었으며, (2)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을 설치해 지방관과 이서층을 조세행정에서 배제하고 조세금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했다. 그리고 (3)황실재정에 집중된 각종 재원을 정부재정으로 이관함으로써 황실의 자율적인 재정 기반을 완전히 해체했다.

대한제국의 화폐제도는 일본에 의해 개편됐으나 당시 대한제국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백동화 인플레’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화폐의 유통, 특히 일본이 금본위제로 전환한 뒤 폐기 처분한 은화와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 설립과 금본위제 실시 및 태환권(금화와 교환을 보장하는 지폐) 발행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1901년 2월 금본위제를 실시한다는 법령을 제정하고(‘화폐조례’), 1903년 3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태환권을 발행하기 위한 법령까지 제정한 상황이었다(‘중앙은행조례’ ‘태환금권조례’). 그러나 법령만 제정, 반포됐을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우선 이익을 침해당하는 일본의 반대가 심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설립돼 제일은행이 관리하던 해관세를 관리하고 자국의 수출품에 대한 결제수단으로 지폐가 사용되는 일을 두려워했다.

또 대한제국은 당시 본위화폐(은화)는 발행하지 않고 보조화폐인 백동화만 대량 발행해 가치가 하락했는데 지폐까지 발행되면 화폐가치가 제대로 유지될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정고문이 부임 후 서둘러 백동화를 발행하는 전환국을 폐쇄하고 국고업무를 제일은행에 위탁하도록 하고 제일은행권을 법화로 만든 것은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중앙은행과 금본위제도를 수립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제일은행은 개항 직후 우리나라에 진출한 첫 번째 외국은행으로 1902년부터 은행권(지폐)까지 발행해 유통시키고 있었다. 재정고문은 우리나라에 발판을 굳히고 있던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승격시켜 제일은행권을 법화로 만드는 동시에 국고 운영을 담당시켰던 것이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31) 일본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였는가
하지만 1905년도의 조세 징수 실적은 좋지 않았다. 제일은행 지점이 적었던 데다 여전히 지방관과 이서층이 조세행정을 담당하고 있어 계획한 대로 직접 국고로 조세가 상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1906년도부터는 통감부 산하 우체국에 173개소의 지금고를 설치해 전국적인 국고망을 갖추는 한편 세무감(관찰사 겸임) 13인, 세무관 36인, 세무주사 168인을 선발해 조세행정을 맡김으로써 지방관과 이서층을 조세행정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갑오개혁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면(面)을 말단 징세기관으로 만들어 군(郡)을 배제한 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이렇게 조밀한 국고망을 갖추고 지방관과 이서층을 배제한 결과 재정능력은 크게 증가했다(그림). 1905년 조세실수입이 308만여원(圓)에 불과했지만 1906년에는 647만여원으로 급증했으며, 1907년에는 다시 1006만여원으로 증가했다(그림은 화폐교환 전후를 연결하기 위해 1圓=2元으로 환산). 하지만 조세 수입은 이후 계속해서 빠르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에 재정고문은 조세수입의 근거로 활용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자 했다. 통감은 식민지로 만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거액의 재정 부담을 초래하는 토지조사사업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으나 이를 계기로 징세대장도 갖춰져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이와 함께 ‘화폐정리’가 실시돼 1905년 7월부터 신구 화폐의 교환이 이뤄진 것도 조세금을 상업자금으로 이용할 수 없게 해 장기적으로는 조세수입의 증가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화폐교환을 일정금액 이하로 한정한다는 소문이 돌아 상인들이 동전이나 백동화를 보유하지 않고 토지나 물건으로 바꾸고자 했다. 이로 인해 화폐교환 과정에서 많은 상인들이 파산했는데 조세금을 상업자금으로 사용하는 길이 두절되고 구화 회수에 비해 신화 발행이 크게 미치지 못해 결제를 위해 화폐가 필요할 때 토지나 물건을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산지경에 처한 상인들은 재정고문에게 자금을 공급해줄 것과 조세금을 상업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정고문은 조세금의 상업적 이용은 철저히 금지했으며 자신의 통제 하에 은행을 설립해 상업자금을 방출할 계획이었다

조세 징수실적이 증대한 것은 화폐교환, 지금고 설치, 징세기구 개편과 같은 재정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대규모 인적·물적 투자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필요한 재원은 조세수입이 아니라 차관 도입으로 충당됐다. 1910년 8월 현재 국채총액은 4559만여원(圓)으로 1905~1910년간의 조세수입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 이런 막대한 차관이 모두 재정능력의 증대를 위해 투입됐던 것은 아니지만, 갑오개혁이나 대한제국이 감당할 수 없었던 대규모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재정능력의 증대는 이미 대한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재정고문과 통감이 장악한 정부재정은 강화됐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황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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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급속히 약화됐다. 재정고문은 취임 후 한동안 황실재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07년의 제3차 한·일 협약 이후 잡세와 홍삼 전매사업이 모두 탁지부로 이관된 데 이어 1908년 황실소유 토지까지 모두 국유화됨으로써 황실의 자율적인 재정기반은 완전히 해체됐다. 황실은 오로지 정부예산에서 편성해 지급하는 황실비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이제 시간문제가 됐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