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zkang@hankyung.com
강은구 기자 ezkang@hankyung.com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54)은 5개월 전만 해도 외교관이었다. 해외 공관 근무에 이어 미국 국무부의 안보협상 보좌역으로 일하다 지난 5월 보잉코리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됐다. 배경을 묻자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높이 평가한 것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미국 인디애나주 출신이지만 한국은 그에게 ‘제2의 고향’과 같다. 1984년 첫 해외 근무지가 부산의 미국 총영사관이었다. 부영사로 1년 동안 부산에서 지냈다. 외교관으로만 한국에 근무하길 세 차례. 30년 외교관 생활 중 3분의 1을 한국에서 보냈다. 한국인인 부인도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할 때 만났다. 통역 없이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한국어도 잘한다.

그가 고른 식당만 봐도 ‘한국통’답다. 서울 다동에 있는 해산물 전문점인 충무집을 택했다. 멍게밥이 별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부산에서 일하면서 거제도에 자주 놀러 가게 돼 자연스럽게 멍게 맛에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 한국 신문 챙겨 읽는 ‘지한파’

존 사장은 영어로 대화하면서도 사이사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섞어 썼다. 국어사전 없이도 한국 신문을 읽을 정도지만 1주일에 두 번 한국어 개인지도를 받는다. 그만큼 자신이 근무하는 현지어에 욕심이 많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한국어는 너무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요즘 TV에서 젊은 외국인들이 나와 한국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면 너무 부럽다”며 자신은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울 때 높임말만 배워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했다.

한국어 외에도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를 배운 배경을 설명하는 와중에 도밋과의 넓적한 생선인 감성돔 조림요리가 나왔다. 감성돔은 대표적인 가을 해산물.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생선 고유의 맛을 냈다”고 식당 사장은 자랑했다. 곧바로 멍게밥도 나왔다. 흰 쌀밥 위에 멍게와 김가루, 무순과 참기름, 참깨를 얹어 보기만 해도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숟가락을 든 존 사장은 능숙한 솜씨로 멍게밥을 쓱쓱 비볐다.

그는 “10년 전 한국 친구와 함께 이 식당에 처음 왔다”며 “이후 ‘별미’를 맛보기 위해 종종 찾고 있다”고 말했다. 보잉코리아 사무실이 있는 서울 파이낸스센터와 가까워 임직원들과 회식을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외교관이 항공산업과의 인연을 맺은 배경을 정색하고 다시 물었다. 존 사장은 추억에 빠져들며 옛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는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요. 어릴 적부터 비행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집안에 모형 비행기도 가득했지요. 아버지처럼 조종사가 되진 않았지만 항공사(보잉)에서 근무할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글로벌 항공기 제조사는 정부 규제와 연관된 사업이 많습니다. 한국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보잉 본사가 한국 사업을 챙길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우연들이 쌓이면 필연적인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과의 오랜 인연은 언제나 자랑거리”라며 부인과 만나게 된 사연도 소개했다.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할 때 처음 만났지요. 자주 보니 정이 들고 같이 데이트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이 청계천과 북악산, 서울성곽 등 여러 명소를 자주 산책해요. (천고마비를 언급하며) 한국의 10월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 기업 경영 열쇠는 리더십

[한경과 맛있는 만남]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김광석 노래 즐겨 듣는 난 한 발은 한국, 한 발은 미국에 있어"
멍게 비빔밥의 감칠맛을 음미할 때쯤 감성돔으로 만든 탕이 나왔다. 같은 재료지만 조림과 달리 탕은 미각을 자극하는 느낌이 또 달랐다. 직업 외교관이 경영인으로 변신하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까.

예상과 달리 그는 “외교관과 경영인은 직업은 다르지만 리더십 측면에서 보면 공통점이 많다”고 답했다. 다양한 업무를 조율하고 끈끈한 인맥을 활용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설명이다. 태국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존 사장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태국 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했다. 당시 대사관 직원만 2000명이 넘었다. 그는 “대사로 근무하면서 여러 기업인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며 “그들과 얘기하면서 외교와 비즈니스의 관계가 얼마나 비슷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외교관이든 글로벌 기업의 해외 사업을 챙기는 비즈니스맨이든 끈끈한 인맥을 활용해 ‘윈-윈’하는 성과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는 30년 외교관 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를 활용해 비즈니스맨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보잉이 자신에게 보잉코리아 경영 책임을 맡긴 것도 외교관으로 한국에서 쌓은 역량을 평가한 때문일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경영인으로서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기업의 업무 진행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고 한다. 장단기 수익을 염두에 두고 매일 의사결정을 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역량을 키워온 만큼 비즈니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CEO의 핵심 덕목으론 겸손함을 꼽았다. 겸손해야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금세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항공기 조종사도 아니고, 항공기를 만들거나 고치는 엔지니어도 아닙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보다는 ‘나는 이 부분을 모르니 도와 달라’고 임직원들에게 솔직히 말한 뒤 같이 추구해야 할 기업의 가치를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요. 그래서 팀워크를 중시합니다. 팀워크가 좋은 조직은 어떤 일을 맞닥뜨려도 해낼 수 있으니까요.”

◆ “내 한쪽 발은 한국에 있다”

존 사장은 작년 7월만 해도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의 미국 측 대표였다. 이 협상은 10차례의 회의 끝에 지난 1월 마무리됐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정말 힘든 협상이었어요. 그때 흰머리가 많이 생겼을 정도지요. 물론 한국 측 회담 당사자였던 황준국 외교부 한·미 방위비분담 협상 대사(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청와대와 국회뿐 아니라 여론까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으니까요.”

외교 업무의 멘토로는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꼽았다. 힐 전 차관보는 1985년 주한 미국대사관 경제담당 서기관이었고, 2004년부터 1년여간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존 사장은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제 상사였는데 벌써 알고 지낸 지가 30년이 지났다”며 “힐 전 차관보는 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스승”이라고 치켜세웠다.

한국인 멘토로는 주저 없이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을 거명했다. 30년 전에 충남 부여에서 열렸던 한 포럼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뭔가 잘못된 길을 간다 싶으면 금방 친절하게 방향을 일러주는 인생 선배라는 것이다. 요즘에도 부부 동반으로 식사할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그는 한국 대중문화도 즐긴다. 한국영화 제목을 꿰고 있을 정도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묘사한 ‘명량’을 감명 깊게 봤다”며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 최민식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배우”라고 평했다. 이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한국 가요 팬이기도 했다. 특히 고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고 한다. 가사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지만 멜로디가 마음에 와닿는다고 한다.

디저트로 나온 사과를 들며 그는 비즈니스맨으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제 한쪽 발은 한국에 있고 다른 발은 미국에 걸쳐 있다”고 표현했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보잉코리아가 한국과 파트너십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30년 경력의 외교관답게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비즈니스맨으로 한·미 관계 증진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보잉은 대한항공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한국 항공 기업들과 함께 사업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잉코리아가 한국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길 원합니다. 한국과 미국 항공업계의 공동 발전, 나아가 두 나라 간 우호관계 증진에도 이바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한국·베트남·태국 등 아시아 정통한 외교관…NBA 인디애나 열혈 팬

“다시 뵙게 돼 반가워요.” 인터뷰 시작 전 또렷한 발음의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오랫동안 일한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한국어와 베트남어에 능통하다.

해외 공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고 최근 들어선 군사 외교 정책 자문을 해왔다. 미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종신회원이다.

농구를 즐기며, 고향인 미국 인디애나주의 주도 인디애나폴리스 NBA 농구팀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열혈팬이기도 하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김광석 노래 즐겨 듣는 난 한 발은 한국, 한 발은 미국에 있어"
■ 에릭 존 사장의 단골집 충무집
사계절 생선 메뉴…서울서 통영 앞바다 맛 가장 잘 살린 곳


[한경과 맛있는 만남]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김광석 노래 즐겨 듣는 난 한 발은 한국, 한 발은 미국에 있어"
서울 다동 하나SK카드빌딩 지하 1층에 있는 충무집은 경남 통영 향토 음식점이다. 2003년 문을 연 이 식당은 “서울에서 통영 앞바다의 맛을 가장 잘 살린 곳”이란 평가를 받는다.

매일 새벽 통영 서호시장에서 싱싱한 생선들을 조달한다. 메뉴는 사계절마다 다르다. 봄에는 도다리쑥국, 여름에는 민어탕, 가을에는 감성돔매운탕, 겨울엔 물메기국이 대표 메뉴다. 또 이 식당의 인기 음식인 잡어회에는 제철의 자연산 생선 7~8종이 한 접시에 오른다. 가을에는 주로 감성돔과 전어 등이 주메뉴다. 제철이 지났거나 당일 없는 생선은 주문을 받지 않는다. 따뜻한 밥 위에 멍게젓과 무순, 김가루, 참기름을 얹은 멍게밥도 별미다. 잡어회는 양에 따라 6만5000원, 8만5000원이다. 계절별 탕·국과 멍게밥이 함께 나오는 메뉴는 2만~2만5000원이다. 영업시간은 평일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다. 매주 일요일은 휴무. 전화번호는 (02)776-4088

■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1960년 美 인디애나주 출생 (조지타운대 외교학과 졸업, 美 국방대 국가안보학 석사) ▷1983년 미 외교국(Senior Foreign Service) 근무 ▷1984~1985년 부산 미 총영사관 부영사 ▷1992~1996년 주한미국 대사관 1등서기관 ▷2002~2005년 주한미국 대사관 정치참사관 ▷2005~2007년 미 국무부 동남아시아 담당 차관보 ▷2007~2010년 태국 주재 미국 대사 ▷2011~2013년 미 공군 참모총장 외교정책보좌역 ▷2013~2014년 5월 미 국무부 산하 정치군사국 안보협상·협정 선임 보좌역 ▷2014년 5월~ 보잉코리아 사장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