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저트 카페 '설빙' 정선희 대표 "인절미 토스트 찾는 중고생에 보람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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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달콤한 딸기 케이크, 폭신폭신 바삭바삭한 바게트. 대학교 3학년생 정선희에게 ‘맛있는 것’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기분이 우울할 땐 딸기 대신 초코 케이크로 기분을 달랬고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릴 땐 식빵의 하얀 속살을 파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막내딸이 좋아하는 음식인지라 빵과 케이크는 식탁과 냉장고, 심지어 책상 위까지 집 안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적어도 ‘아빠가 당뇨병’이란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이후 밀가루로 만든 빵과 케이크는 그녀의 집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내심 슬펐지만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아빠가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녀에겐 빵과 케이크 못지않게 좋아하던 떡이 있었다. 보슬보슬하고 달달한 백설기, 콩고물에 찍어 먹는 쫀득쫀득한 인절미. 아빠의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의 ‘맛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쌀로 만든 떡으로 이동한다. 식품영양학과의 전공을 살려 쌀과 어울리는 부재료를 찾아내 직접 떡을 만들었다. 타고난 재능인 색채감·공간감을 더해 새로운 떡도 만들어 냈다. 안타깝게도 찜통에서 나온 것은 떡이 아니라 죽인 경우도 가끔 있었고 유치원생이 장난질을 한 것 같은 떡도 나왔다. 그래도 아빠는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막내딸이 손수 만든 ‘엉터리 떡’을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별난 맛도 없는 못난이 떡을 드시고 웃는 아빠의 미소가 설빙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였어요.”
10년 전 아빠의 당뇨병을 걱정해 손수 떡을 만들던 여대생 정선희. 지난해 여름부터 외식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리안 디저트 카페 ‘설빙’의 대표다.
당뇨병 아빠 위해 손수 떡 만들어
설빙이 등장한 것은 작년 4월. 서울도 아닌 부산이었다. 남포동에서 첫 매장을 연 지 1년 5개월 만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약’ 426호점의 점포망을 구축했다. 점포 수 앞에 굳이 ‘약’을 붙인 이유는 하루가 다르게 점포 수가 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란 의미다.
설빙의 대표 메뉴는 인절미 빙수인 ‘설빙’. 빙수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빙수라고 하지 않고 설빙이라고 부른다. 자세히 보면 납득할 수 있다. 모양새는 팥빙수. 그러나 속 내용이 다르다. 먼저 물을 얼린 얼음을 간 것이 아니다. 우유 얼음을 갈아 눈꽃처럼 보드랍다. 여기에 고소한 콩가루와 인절미 떡을 올려 맛을 냈다. 우유·콩가루·인절미의 삼요소가 만들어 내는 영양·건강·전통의 삼중주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콤하고, 게다가 뱃속까지 든든하다. 빙수보다 여러모로 한 수 위다. 지난해는 집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지난 1월부터 9월 25일까지 팔린 설빙은 모두 1538만7800그릇이다. 아직 설빙 브랜드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텐데 이 정도 숫자니 ‘폭발적 인기’란 단어가 딱 맞아떨어진다. 메뉴 체크가 식사…성공에 우연은 없다
“아빠에게 떡을 만들어 드리면서 저도 케이크와 빵을 끊었어요. 그랬더니 1년 새 몸무게가 4kg이나 줄더라고요. 도랑 치다 가재 잡은 격이었지요. 그때가 가장 날씬했어요.” 월매출 300억 원의 전문 경영인(CEO)이기보다 여전히 몸매를 걱정하는 서른둘의 천생 여자다.
“저는 떡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제 주변의 친구들은 케이크·빵·과자만 좋아하더라고요. 마치 떡은 어른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외면하고 말이죠.”
친구들에게 맛있는 떡을 만들어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 떡을 만들 때 조금씩 나눠 줬다. 매번은 아니지만 맛있다며 더 달라는 친구가 생겼다. ‘그래, 열심히 하면 젊은 사람들도 좋아하는 떡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 아빠 떡을 만들던 정선희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음식 공부를 떠난다. 일본의 제과·제빵의 기술을 우리의 전통 떡과 한과에 접목해 디저트 음식으로 풀어 보려는 구상이었다. 원대한 꿈이라기보다 정 대표 역시 일반 유학생들처럼 작은 희망을 품고 도쿄로 갔다고 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리 곳곳에 있는 빵·케이크 전문점이나 전통 과자 판매점의 상품들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쇼핑센터 지하에 진열돼 있는 음식이나 디저트 등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모양이나 포장에 정성을 들였다.
“다시 먹기 시작했어요. 짬을 내 여기저기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너무 달아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먹으며 내 나름의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메모하며 머릿속에 넣었어요. 한국에 돌아오니 8kg나 쪄 있더라고요.”
귀국해 바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부산 집을 떠나 서울에서 2년여 동안 남 밑에서 일을 했다. 우연히 쉴 기회가 생겨 부산에 내려왔다가 ‘어차피 내 사업할 것이면 빨리 저지르자’고 결심한다. 마침내 2011년 부산 수영구 남천동에 퓨전 콘셉트의 떡 카페 ‘시루’를 오픈한다.
“초기엔 하루에 10만 원어치 정도 팔았어요.“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열심히 만들면 손님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러다가 실패하더라도 아직 젊으니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종잣돈을 도와준 아빠 역시 돈 벌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도 홀로 열심히 떡을 빚었고 짬짬이 주변 사람들에게 맛보기로 돌렸다. 다른 제품을 만들어 단골손님의 반응도 체크했다.
“초기 투자비가 8000만 원 들어갔어요. 제 돈과 아버지 도움으로 5000만 원을 준비했고 3000만 원은 싼 이자로 은행 대출을 받았어요. 망해도 될 만큼의 자금으로 시작한 거죠.” 정 대표는 설빙의 가맹점주는 물론 창업 희망자에게 꼭 하는 충고가 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다. 빤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강조한다.
여름철 신메뉴로 자신이 집에서 만들어 먹던 걸 제품화했다. 설빙과 인절미 토스트다. 인절미 토스트는 식빵 두 조각 사이에 인절미를 넣고 오븐에 구운 것. 그 위에 각종 견과류와 꿀을 얹어 고소함과 단맛을 더했다. 두 메뉴를 선보이자 뜻하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인근 초중·고교 학생들이었다.
“눈물이 났어요. 학생들이 찾는다는 건 제 친구들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정 대표가 꿈꿔 온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한식 디저트 카페’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설빙의 모태가 된다.
정 대표는 설빙이 국내 외식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남 잘되면 무조건 따라 하기’ 풍토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설빙 흉내를 냈다가 고전하는 짝퉁 브랜드에 대해 걱정이다. “남의 지식재산을 함부로 도용하는 등 문제의 심각성이 크지만 전 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망하는 걸 보면 마음이 더 안쓰럽다”고 했다.
젊은 오너인 정 대표의 성공엔 외식 업계에 흔한 인생 역전 드라마가 없다. 개천에서 용 난 스토리도 없다. 그래서 “우연이다” 또는 “운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그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점심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신제품 시식회를 하거나 매장을 돌며 현장에서 메뉴를 체크하다 보니 먹지 못하는 것이다. 몸무게가 가장 날씬했을 때보다 10kg 이상 늘었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도 정직하고 좋은 재료로 손님들과 신뢰를 쌓으면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만들어 낸 이유 있는 성공임에 틀림없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 / 한경닷컴 뉴스팀 newsinfo@hankyung.com
이후 밀가루로 만든 빵과 케이크는 그녀의 집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내심 슬펐지만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아빠가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녀에겐 빵과 케이크 못지않게 좋아하던 떡이 있었다. 보슬보슬하고 달달한 백설기, 콩고물에 찍어 먹는 쫀득쫀득한 인절미. 아빠의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의 ‘맛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쌀로 만든 떡으로 이동한다. 식품영양학과의 전공을 살려 쌀과 어울리는 부재료를 찾아내 직접 떡을 만들었다. 타고난 재능인 색채감·공간감을 더해 새로운 떡도 만들어 냈다. 안타깝게도 찜통에서 나온 것은 떡이 아니라 죽인 경우도 가끔 있었고 유치원생이 장난질을 한 것 같은 떡도 나왔다. 그래도 아빠는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막내딸이 손수 만든 ‘엉터리 떡’을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별난 맛도 없는 못난이 떡을 드시고 웃는 아빠의 미소가 설빙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였어요.”
10년 전 아빠의 당뇨병을 걱정해 손수 떡을 만들던 여대생 정선희. 지난해 여름부터 외식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리안 디저트 카페 ‘설빙’의 대표다.
당뇨병 아빠 위해 손수 떡 만들어
설빙이 등장한 것은 작년 4월. 서울도 아닌 부산이었다. 남포동에서 첫 매장을 연 지 1년 5개월 만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약’ 426호점의 점포망을 구축했다. 점포 수 앞에 굳이 ‘약’을 붙인 이유는 하루가 다르게 점포 수가 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란 의미다.
설빙의 대표 메뉴는 인절미 빙수인 ‘설빙’. 빙수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빙수라고 하지 않고 설빙이라고 부른다. 자세히 보면 납득할 수 있다. 모양새는 팥빙수. 그러나 속 내용이 다르다. 먼저 물을 얼린 얼음을 간 것이 아니다. 우유 얼음을 갈아 눈꽃처럼 보드랍다. 여기에 고소한 콩가루와 인절미 떡을 올려 맛을 냈다. 우유·콩가루·인절미의 삼요소가 만들어 내는 영양·건강·전통의 삼중주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달콤하고, 게다가 뱃속까지 든든하다. 빙수보다 여러모로 한 수 위다. 지난해는 집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지난 1월부터 9월 25일까지 팔린 설빙은 모두 1538만7800그릇이다. 아직 설빙 브랜드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텐데 이 정도 숫자니 ‘폭발적 인기’란 단어가 딱 맞아떨어진다. 메뉴 체크가 식사…성공에 우연은 없다
“아빠에게 떡을 만들어 드리면서 저도 케이크와 빵을 끊었어요. 그랬더니 1년 새 몸무게가 4kg이나 줄더라고요. 도랑 치다 가재 잡은 격이었지요. 그때가 가장 날씬했어요.” 월매출 300억 원의 전문 경영인(CEO)이기보다 여전히 몸매를 걱정하는 서른둘의 천생 여자다.
“저는 떡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제 주변의 친구들은 케이크·빵·과자만 좋아하더라고요. 마치 떡은 어른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외면하고 말이죠.”
친구들에게 맛있는 떡을 만들어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 떡을 만들 때 조금씩 나눠 줬다. 매번은 아니지만 맛있다며 더 달라는 친구가 생겼다. ‘그래, 열심히 하면 젊은 사람들도 좋아하는 떡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 아빠 떡을 만들던 정선희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음식 공부를 떠난다. 일본의 제과·제빵의 기술을 우리의 전통 떡과 한과에 접목해 디저트 음식으로 풀어 보려는 구상이었다. 원대한 꿈이라기보다 정 대표 역시 일반 유학생들처럼 작은 희망을 품고 도쿄로 갔다고 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리 곳곳에 있는 빵·케이크 전문점이나 전통 과자 판매점의 상품들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쇼핑센터 지하에 진열돼 있는 음식이나 디저트 등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모양이나 포장에 정성을 들였다.
“다시 먹기 시작했어요. 짬을 내 여기저기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너무 달아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먹으며 내 나름의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메모하며 머릿속에 넣었어요. 한국에 돌아오니 8kg나 쪄 있더라고요.”
귀국해 바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부산 집을 떠나 서울에서 2년여 동안 남 밑에서 일을 했다. 우연히 쉴 기회가 생겨 부산에 내려왔다가 ‘어차피 내 사업할 것이면 빨리 저지르자’고 결심한다. 마침내 2011년 부산 수영구 남천동에 퓨전 콘셉트의 떡 카페 ‘시루’를 오픈한다.
“초기엔 하루에 10만 원어치 정도 팔았어요.“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열심히 만들면 손님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러다가 실패하더라도 아직 젊으니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종잣돈을 도와준 아빠 역시 돈 벌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도 홀로 열심히 떡을 빚었고 짬짬이 주변 사람들에게 맛보기로 돌렸다. 다른 제품을 만들어 단골손님의 반응도 체크했다.
“초기 투자비가 8000만 원 들어갔어요. 제 돈과 아버지 도움으로 5000만 원을 준비했고 3000만 원은 싼 이자로 은행 대출을 받았어요. 망해도 될 만큼의 자금으로 시작한 거죠.” 정 대표는 설빙의 가맹점주는 물론 창업 희망자에게 꼭 하는 충고가 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다. 빤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강조한다.
여름철 신메뉴로 자신이 집에서 만들어 먹던 걸 제품화했다. 설빙과 인절미 토스트다. 인절미 토스트는 식빵 두 조각 사이에 인절미를 넣고 오븐에 구운 것. 그 위에 각종 견과류와 꿀을 얹어 고소함과 단맛을 더했다. 두 메뉴를 선보이자 뜻하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인근 초중·고교 학생들이었다.
“눈물이 났어요. 학생들이 찾는다는 건 제 친구들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정 대표가 꿈꿔 온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한식 디저트 카페’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설빙의 모태가 된다.
정 대표는 설빙이 국내 외식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남 잘되면 무조건 따라 하기’ 풍토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설빙 흉내를 냈다가 고전하는 짝퉁 브랜드에 대해 걱정이다. “남의 지식재산을 함부로 도용하는 등 문제의 심각성이 크지만 전 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망하는 걸 보면 마음이 더 안쓰럽다”고 했다.
젊은 오너인 정 대표의 성공엔 외식 업계에 흔한 인생 역전 드라마가 없다. 개천에서 용 난 스토리도 없다. 그래서 “우연이다” 또는 “운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그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점심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신제품 시식회를 하거나 매장을 돌며 현장에서 메뉴를 체크하다 보니 먹지 못하는 것이다. 몸무게가 가장 날씬했을 때보다 10kg 이상 늘었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도 정직하고 좋은 재료로 손님들과 신뢰를 쌓으면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만들어 낸 이유 있는 성공임에 틀림없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 / 한경닷컴 뉴스팀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