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입사 초기 해외연수까지 양보하는 '義理義理'
국내 중견 건설사 분양사업부의 김모 차장은 올 들어 부쩍 소화제를 먹는 일이 잦아졌다. 작년 말 승진 경쟁을 벌였던 입사 동기 이 부장이 분양사업본부장으로 부임하고 나서부터다. 직속상관이 돼 거드름을 피우는 입사 동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후배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승진 늦은 티 낸다’란 뒷담화를 듣기 싫어 속내를 감추고 입사 동기를 깍듯이 대한다.

혹자는 입사 동기를 부부에 비유한다. 입사 초기엔 신혼부부처럼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하게 지내다가도 나이를 먹으면 자연 경쟁 상대가 돼 애증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퇴임할 즈음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노년부부처럼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가 버팀목이 돼준다. 이번주 김과장이대리에선 한 직장에서 산전수전을 함께 겪는 입사 동기와 관련한 울고 웃는 에피소드들을 취재해봤다.

의리와 회사 생활은 별개라지만…

정보기술(IT) 대기업의 김모 대리는 최근 입사 동기에게 ‘티 안나는 양보’를 했다. 김 대리 회사는 2년에 한 번 정도 해외 연수자를 선발한다. 올해 해외 연수 지역은 중남미. 스페인어를 전공한 김 대리에겐 견문을 넓히고 외국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입사 동기인 박 대리. 박 대리는 입사 초기부터 “내 꿈은 남미 법인에서 근무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둘은 입사 후 같이 먹은 술값만 수백만원에 이르는 둘도 없는 사이다. 친한 선배들은 ‘의리와 회사 생활은 별개의 건’이라며 지원을 권유했지만 김 대리는 장고 끝에 2년 후로 지원 시기를 늦췄다. 결국 박 대리가 해외 연수자로 선발됐고 김 대리는 한국에 남았다.

은근히 일 떠넘기는 동기 때문에 속앓이

입사 동기 간 갈등이 시작되는 계기는 ‘업무 분담’ 때문이다.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박모 주임은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 최근 회계부로 부서를 옮겼다. 이곳에는 입사 동기 양모 주임이 먼저 와 있었다. 나이는 박 주임이 한 살 위지만 해당 업무는 선임자인 양 주임이 더 잘 알아 서로 존대하며 그럭저럭 잘 지냈다.

사달이 난 것은 실적정리를 다루는 업무 때문이었다. 실적보고는 손이 많이 가는, 그래서 다들 맡기를 꺼리는 업무 중 하나다. 그동안 양 주임이 맡아왔는데 부장은 그중 분기 실적을 떼어 박 주임에게 맡겼다. 그러나 얼마 뒤 양 주임이 회사를 못 나와 박 주임이 주간 실적까지 대신해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양 주임은 “별로 안 어렵죠. 데이터 관리는 한 사람이 몰아서 하는 게 좋아요”라며 나머지 업무까지 모두 떠넘겼다. 박 주임은 입사 동기가 선임 텃세를 한다 싶었지만, 불필요한 잡음이 날 것 같아 꾹 참아야 했다.

국내 대형 제조업체 기획실에서 일하는 이모 사원은 같은 부서 입사 동기인 김모 사원 때문에 머리가 빠질 지경이다. 입사 초기엔 둘도 없는 오피스 친구였다. 하지만 1년 전 김모 사원이 결혼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결혼 이후 김씨가 임신을 핑계로 일을 이씨에게 떠넘기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이씨는 김씨에게 “차라리 출산휴가를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김씨는 “집을 사느라 갚아야 할 대출금이 많다”며 임신 9개월인 현재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다.

입사 동기간 치열한 경쟁에 미소짓는 회장님

입사 동기 간 경쟁이 회사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A식품그룹 계열사인 B사와 C사는 비슷한 제품을 만들지만 사내 경쟁을 위해 별도 법인체제를 갖추고 있다. B사의 박모 영업본부장과 C사의 김모 영업본부장은 그룹 공채 입사 동기로 신입사원 시절부터 전국 영업 실적 1, 2위를 다투던 라이벌이다. 2000년대 초반 지점장 시절엔 서울 강남권에서 1년 반 동안 맞붙어 반기 실적 기준으로 박 본부장이 두 번, 김 본부장이 한 번 전국 1등을 차지했다. 사적으로 만나면 밤을 새우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지만 밖에선 서로 자기가 낫다고 큰 소리.

동기 간 치열한 경쟁 덕분인지 A그룹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장했다. 차기 그룹 영업총괄직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두 사람을 존경하는 후배들도 많다. A그룹 회장은 동기 간 경쟁을 은근슬쩍 부추기고 있다.

지나고 나면 갈등도 추억의 한페이지

입사 동기들과의 에피소드는 좋은 추억거리가 된다. 현재 IT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은 중소 부품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김 과장이 근무했던 부품회사는 2007년 세워진 신생 회사로, 입사 동기는 8명이었다. 이들은 대접받기 힘든 상황에서 치열하게 영업하며 각종 전설을 만들어냈다. 회사는 점차 성장했고, 그때 동기들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스카우트돼 흩어졌다. “제 동기들은 각자의 회사에서 내로라하는 에이스가 됐습니다. 다들 신입 때부터 진흙탕에서 구른 덕에 파이팅이 넘치죠. 같이 굴렀던 기억을 못 잊고 요즘도 분기에 한 번 정도는 만납니다.”

1년 뒤 은퇴를 앞둔 한 공기업의 최모 본부장은 지금도 입사 동기 15명을 반기에 한 번씩은 만난다. 최 본부장이라고 동기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5명이 회사의 ‘허리’ 역할을 톡톡히 한 덕분에 최 본부장 동기들은 사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 “생각해보면 동기 때문에 치이기도 했고, 제가 동기를 밟고 올라서기도 했지만 모두 훌륭한 성품과 자질 때문에 끌고 밀어주는 사이가 됐죠. 아직 뒤처진 동기도 있지만 스스럼없이 술 한잔 할 수 있는 것은 치열한 동기애와 그때의 추억 때문이 아닐까요.”

황정수/안정락/김은정/강현우/김동현/김인선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