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말5초'도 재취업 막막…도서관 전전, 연봉 절반  깎여도 일할 곳만 있다면…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5시30분이면 눈이 떠진다. 21년간 몸에 밴 습관, 무섭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지만 등만 아프다. 아내와 아이들이 현관 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 쉬시는데 조용히 해야지.” 아내의 낮은 목소리는 차라리 비수다. 걱정하는 가족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는 아직 없다. 식탁에 차려진 아침밥을 삼키며 고민한다. “오늘 점심은 누구랑 먹지?” 스케줄 없는 하루가 이렇게 또 시작된다.

상무 3년차에 퇴직 통보를 받은 지 2주가 지났다. 매 순간 우울해지려는 마음과 전쟁 중이다. 이럴 때면 ‘걱정할 필요 없는 이유’를 억지로라도 머릿속에 정리하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떠날 회사. 몇 년 먼저 나간다고 생각하자. 앞으로 1년 동안 연봉의 70%도 나온다. 아내도 돈을 벌지 않는가. 그래, 너무 달려왔다. 좀 쉬고 다시 시작하자.’

친한 선후배들을 불러냈다. 조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됐다. 우선 두세 달은 푹 쉰다고 생각하란다. 임원 구조조정 시즌인 연말 연초엔 발버둥 쳐 봐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년 이상 재취업을 미루면 사람 망가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받던 연봉의 절반만 준다고 해도 3~4년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곧바로 취직하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중소기업 임원으로 갈 땐 회사 내용과 오너의 평판 등을 꼼꼼히 따지고 출자나 보증을 요구하는 곳은 피하라고 했다. 섣불리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임원 퇴직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란다.

매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지만 일상은 아직 문제투성이다. 무엇보다 2~3개월 논다고 해도 할 일이 없다. 집 근처 헬스장부터 끊었지만 곧바로 해약했다. 낮엔 온통 동네 아주머니와 노인들뿐이었다. 공공 도서관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우울함만 증폭됐다. 산에 가볼까도 했지만 퇴직 선배들이 하나같이 말렸다. “평일 낮엔 산에 가지 마라. 거기 가면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고 어울리다 보면 술 마시게 되고…. 그럼 일상의 리듬이 깨진다. 산은 주말에만 다녀라.”

그래도 퇴직 후 2주 동안 세 가지 교훈은 확실히 건졌다. 첫째 힘들 땐 역시 가족과 친구밖에 없다는 것.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또 하나는 회사 말고도 자기가 속하는 커뮤니티를 하나 이상 꼭 가져야 한다는 것. 동네 테니스 클럽도 좋고, 교회 같은 종교 커뮤니티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잘나갈 때일수록 사람을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인상을 줘야 어려울 때 만나주기라도 한다.

“상무님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헤드헌팅회사 직원의 ‘영혼 없는’ 대답에 힘이 빠져 있을 무렵, 고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점심 약속 있니? 밥이나 먹자.” 정말 고마웠다. 내일 점심 한 끼는 해결됐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