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 세 곳 중 한 곳에서 ‘고용세습’이 이뤄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해당 기업 근로자의 자녀나 가족을 우선 채용하는 ‘귀족노조’의 고용세습은 공정한 경쟁을 통한 청년취업을 가로막는 ‘현대판 음서제’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최대 국정 과제로 추진하는 능력중심사회 구현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청년일자리 뺏는 귀족노조 '고용세습'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6월 한국노동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한 ‘단체협약 실태 분석’에 따르면 조사 대상 727개 단체협약 가운데 공기업 120여곳을 제외한 600여개 단협 중 29%인 180여개에 직원 가족의 채용 특혜를 보장하는 세습 조항이 들어 있다. 고용세습은 대부분 임금·단체협상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요구를 회사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단협에 포함된다.

고용부 관계자는 11일 “아직 최종 연구보고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대기업이 고용세습 조항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산업재해를 입어 직원 가족의 생계가 어려운 경우 외에도 정년퇴직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등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고용세습 사례는 정년퇴직자의 가족에게 공채 과정에서 특혜를 주는 것이다. A타이어에서는 정년퇴직자 직계가족에 대한 우선 채용 조항이 명시돼 있고, B자동차에선 정년퇴직 후 1년 이내인 근로자의 직계비속을 우선 채용한다고 단협에 규정돼 있다. C자동차는 25년 이상 장기근속 근로자 자녀 중 한 명을 우선 채용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청년일자리 뺏는 귀족노조 '고용세습'
D공조는 업무상 재해가 아닌 업무 외적인 이유인 부상이나 질병으로 퇴직한 경우에도 직원 가족을 특별채용하는 조항을 두고 있다.

노조가 없는 대기업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굴지의 E그룹은 임원(상무급 이상) 자녀가 신입사원 채용에 지원하면 일정 부분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근로자가 산재를 당해 가족 생계가 위협받는 경우 자녀 한 명의 취업을 보장하는 방식 등 일부 상식적인 선에서 용인될 만한 부분도 있지만, 정년 퇴직이나 업무외 부상, 질병 퇴직자 가족에 대해서까지 채용을 보장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도를 넘는 고용세습 조항에 대해 노조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한 조합원은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하루에도 수백명씩 해고되는 상황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 집행부가 선거전략으로 이런 조항을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조합원들도 스스로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그런 점에서 반성한다”고 말했다.

노조 안팎의 시선과는 별개로 고용세습 관행은 정부가 추진 중인 능력중심사회 구현 정책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박근혜 정부는 최대 국정과제인 능력중심사회 건설을 위해 올해부터 학벌이나 영어 등의 스펙 대신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채용 문화를 확산시키겠다며 공기업·공공기관 100여곳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취업을 준비 중인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스펙 폐지보다 시급한 것이 공정한 기회 보장이라는 지적이 많다. 서울의 한 명문대를 졸업하고 2년째 공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박모씨는 “명문대를 나왔다고 학력이나 학벌 채용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하지만 정부에서 능력중심사회 건설을 먼저 외칠 게 아니라 채용시장의 ‘음서제’부터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간기업에서 고용세습이 이뤄져도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기업의 고용세습을 방지하는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행정적으로 시정조치를 내리거나 할 사안은 아니다”며 “다만 교섭 지도 과정에서 노사에 개선을 권고할 수 있다”고 했다.

고용세습에 대한 행정지도는 불가능하지만 법원 판단은 엄격하다. 2013년 5월 울산지방법원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뒤 2011년 업무상 재해(폐암)로 사망한 황모씨의 유족이 “단협 96조에 따라 황모씨의 자녀를 특별채용하라”며 현대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결격사유가 없는 한 유족 채용을 확정하도록 단협을 통해 제도화하는 방식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결과를 낳아 다수의 취업 희망자를 좌절케 한다”며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에 대해선 노사가 합의하더라도 법률상 무효이며 노조의 인사권 침해”라고 판시했다.

이번 연구용역은 고용부가 1990년대 이후 약 5년 주기로 실시하는 정기 조사로 시대 변화에 따른 노사관계, 근로조건, 복지, 채용문화 등을 가늠하는 기초자료로 쓰인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