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인천 어린이집 폭행사건이 터지자 관련 법안 발의가 이어졌다. 사건발생 후 나흘 만에 어린이집 관리·감독과 보육교사에 대한 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 4개가 곧바로 국회에 제출됐다. 근본적인 대책보다 법안발의 속도경쟁에 초점을 맞춘 ‘인스턴트’식 법안들이다.
사건 터지면 '우후죽순' 발의…여야 '품앗이 입법'도 판쳐
대표적인 게 지난 3일 국회 본회의 문턱에서 좌절된 영유아보육법이다. 여론에 등 떠밀린 졸속 입법의 한계를 드러내며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영유아보육법’은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당 소속 의원 1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발의됐다. 단 하루 만에 법안을 만들고 의원 10명의 공동발의 요건만 갖춰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법안은 아동학대가 발생하는 즉시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의 자격을 정지하고 어린이집을 폐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법안을 급히 마련하다 보니 단 한 차례의 공청회도 거치지 않았다.

입법조사처 한 관계자는 “현안 이슈를 선점하려는 욕심에 너무 급박하게 법안 발의가 된 것 아니냐”며 “여론을 고려하더라도 헌법상 ‘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데 법안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쉽게 발의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신학용 새정치연합 의원은 보육교사의 인성교육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은 본회의에서 부결된 어린이집 폐쇄회로TV(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박 의원은 향후 5년간 79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 것이란 비용추계서를 첨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보건복지부는 총 800억~1000억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예산에 대해 충분한 논의조차 하지 않은 채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19대 국회(2012년 6월~) 들어 지난 1월까지 의원들이 발의한 각종 세법 개정안은 434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137개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어 조세제도에 반영됐으며 297개는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매년 100건 훌쩍 넘게 세법 개정안이 쏟아지는 데다 의원들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선심성 법안이 적지 않아 제대로 된 심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2013년 연말정산 논란을 부른 세법 개정안 심의 때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는 147건의 세법을 한꺼번에 심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법안들이 인스턴트 식으로 발의되는 것을 두고 야당 의원실 한 보좌관은 “법안발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회 예산정책처 예산분석실 관계자는 “앞다퉈 법안발의가 이뤄지다 보니 법안에 드는 예산에 대한 비용추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며 “어떤 의원실에는 (비용추계를) 의뢰하고 단 하루 만에 다 해달라고 독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스턴트 법안’은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묻지마 입법’의 또 다른 형태다. 한국경제신문이 조사한 결과 올해 1월1일부터 현재까지 국회의원이 발의한 의원입법 중 비용추계를 해야 하는 법안은 총 101개. 그중에서 87.12%인 88개 법안에 ‘비용추계서’가 첨부되지 않았다. 국회법에 따르면 예산 또는 기금이 필요한 법안은 예상 비용을 산정한 추계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신규 사업을 위해 예산이 반드시 필요한 제정법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달 27일 강은희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이야기 산업 진흥에 관한 법안’, 같은 달 5일 정호준 새정치연합 의원이 발의한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등은 제정법임에도 불구하고 비용추계서를 첨부하지 않았다.

‘품앗이’형 공동 입법발의 관행도 입법폭주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회법은 법안 발의에 신중을 기하도록 10인 이상 의원의 서명을 받아 발의하도록 정하고 있다. 법 취지대로라면 법안의 소관 상임위원회 소속 여·야 위원을 찾아가 설득하고 서명을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여당은 여당의원끼리 야당은 야당의원끼리 공동 발의한다.

심지어 의원이나 보좌관끼리 친한 경우에는 법안의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도장’을 찍어 준다. 이렇게 ‘품앗이’로 10개 도장이 모이면 법안은 발의된다. 그러다 보니 의원 스스로 발의한 법안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실 보좌관은 “본회의 때 자신이 공동 발의한 법안을 모르고 ‘반대’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고 했다.

진명구 기자 pmg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