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입법 50건 철회시킨 '슈퍼甲 시민단체'
시민·이익단체들이 국회의원의 입법권에 압력을 행사해 법안을 철회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민단체나 특정 이익단체들이 투표권을 앞세워 정당한 입법권을 침해하는 ‘입법 갑(甲)질’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국경제신문이 19대 국회 들어 철회된 총 143건의 법안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이들 법안 중 시민단체, 특정 이익집단과 관련된 법안이 총 50건에 달했다.

상임위원회별로는 환경노동위원회가 28건(19.6%)으로 가장 많았고, 국토교통위원회 19건(13.3%), 안전행정위원회 15건(10.5%) 등이었다. 이들 철회 법안은 특정 직업 영역의 업무와 권한을 바꾸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이익집단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시민·이익단체 반발에 소신 입법 ‘백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10월께 여야 의원 45명과 함께 ‘인권교육 지원 법안’을 발의했지만 동성애 반대 단체의 반발로 법안을 자진 철회했다. 법안에는 ‘동성애’에 관한 용어나 이를 지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관련 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산하 인권교육원에서 교육을 담당하도록 한다’는 문구를 문제 삼아 “국가인권위원회법상 차별 행위는 ‘성적 지향’도 포함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조장하는 법”이라고 철회를 촉구했다. 이 단체는 유 의원은 물론 공동 발의한 45명 국회의원 모두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끊임없이 철회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상임위 중에서 이익집단의 민원이 가장 심한 곳으로 보건복지위원회가 꼽힌다. 보건의료, 사회복지·장애인단체 등이 대거 몰려 있기 때문이다.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12월 발의한 ‘학교보건법’ 개정안은 보건교사들의 반발로 열흘 만에 철회됐다. 법안은 시골 분교 등에 순회 보건교사를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자 보건교사회는 자신들의 고유 업무가 위축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발했다. 신경민 의원실 관계자는 “다른 대안을 찾고 있지만 (보건교사들의 반발 등을 고려하면) 섣불리 다른 법안을 내기 어렵다”고 했다.

새누리당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법안을 발의할 때도 그렇지만 법안을 철회하는데도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인한 사례가 많다”며 “의원 개인의 소신대로 법안을 발의해도 결국 시민단체 등을 통해 시끄러워지면 법안을 더 이상 추진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실 보좌관도 “시민단체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의원이나 보좌관 등에게 새벽에 전화를 걸어 폭언을 쏟아붓는다”며 “선거 때 낙선운동을 하겠다는 협박전화를 견딜 의원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과잉 입법 견제 역할도”

시민·이익단체의 반발이 과잉 입법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반론도 있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해 5월28일 ‘장애인 인권침해 방지 및 피해장애인 보호 등에 관한 법안’을 발의했다가 철회했다. 장애인 관련 단체 등과 협의를 거쳐 법안을 다시 발의했다. 장애인인권연대 등과 장애인권리보호센터의 권한과 업무에 대해 논의가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한 것이라는 게 안 의원 측 설명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한 관계자는 “시민단체 등이 국회에 집단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를 반영하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말했다.

진명구 기자 pmg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