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불공정 발주] '슈퍼갑' 공기관…법에 없는 규정 만들어 시공사에 부담 떠넘겨
현대 포스코 대우건설 등이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낸 공사기간 지연에 따른 추가 비용 소송은 그동안 당연시하던 공공(公共)기관 ‘불공정 발주 관행’에 제동을 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공기관은 그동안 비용 절감을 이유로 국가계약법에 상충하는 자체 규정까지 만들어 건설회사에 부담을 넘겼다. 건설회사들은 사업의 명줄을 쥐고 있는 공공기관의 요구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다.

건설회사들이 이번에 소송전까지 불사한 것은 최저가낙찰제 등으로 공공공사 수익성이 크게 나빠진 상황에서 추가 비용까지 짊어질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번 소송 결과에 따라 추가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건설업계 전망이다.

◆관행이 된 단가 후려치기

도로공사 철도시설공단 LH(한국토지주택공사) 서부발전 등 주요 공공기관은 국가계약법에 명시된 설계변경 단가와 달리 자체 ‘공사계약 특수조건’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국가계약법상 발주기관 요구로 설계를 변경할 때 계약단가는 설계변경 단가와 설계변경 단가에 낙찰률을 곱한 금액 중 하나로 정할 수 있다. 양측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두 금액의 평균으로 정하게 돼 있다. 하지만 도로공사는 ‘설계변경 때 신규 대체항목 단가협의 기준’과 ‘일괄입찰 등의 설계변경 때 신규 항공 단가 기준’을 따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공사 안전과 관련된 산업안전보건관리비 기준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공사비에 일정 요율을 곱한 금액으로 산출하는 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시공 안전을 위해 법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하지만 수자원공사는 입찰공고문에서 일반건설공사 요율(1.97%)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타건설공사 요율(1.26%)을 적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기간을 연장할 때 추가 비용을 반영하지 않는 사례도 빈번하다. 혹서기와 혹한기에 공사를 일시 중단할 수 있는 휴지(休止·멈춰 쉼)기간 제도를 악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현대건설 등 7개사의 도로공사 소송도 이와 관련됐다. 한 대형 건설사 도로공사 현장감독은 “공사 휴지기에도 (발주처의) 작업 지시는 계속 내려와 쉴 수가 없다”며 “휴지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공공 발주처에 반기 든 건설업계

A건설은 발주처인 한 공공기관 요구로 경기지역 철도건설 현장에서 터널용 부품과 콘크리트 연결부를 교체했다. 설계변경으로 단가가 변경될 경우 발주처는 시공사와 협의해야 하지만 해당 공공기관은 내부 지침에 따라 계약단가를 낮췄다. 이 회사는 10억여원의 손해가 발생, 소송을 진행 중이다. B건설은 발주처 요구로 공항KTX라인 설계를 변경한 뒤 추가 비용 400억여원을 받지 못해 발주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건설사들이 공공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적극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초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한 대형 건설사 수주담당 상무는 “공공공사는 손해만 안 보면 다행이라는 말이 일반화됐다”며 “그러다 보니 법에 어긋나는 공공기관 요구로 손해를 입었을 경우 소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형 건설사별로 많게는 20건 가까이 소송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태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기관의 부채가 수십조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단가 후려치기 관행을 단기간 내 없애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SOC(사회간접자본) 공사가 차질없이 진행되려면 적정 예산을 배정하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

김진수/양병훈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