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공무원 출신 ‘영업의 달인’
잘나가던 공직 뛰쳐나와 입사
월 150대 판매하며 영업왕 올라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들어라
부임후 1년 반 동안 전국 돌며
영업지점 100여곳 모두 방문

한국을 알아야 해법 찾는다
한국음식 즐기며 직원들과 소통
해외공장서 신차 조달해 ‘대박’


프랑스인인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나이는 마흔셋.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최고경영자(CEO)로선 젊은 축에 속했다. 르노그룹의 비유럽 지역 공장 중 가장 큰 르노삼성자동차 대표로선 더욱 그랬다. 당시 한국에 있는 부장들보다 나이가 더 적었으니 말이다.

프랑수아 프로보 르노삼성 사장(47)은 이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젊은 게 장점이 되려면 누구보다 직원들과 가까워져야 한다’라고. 40대 CEO를 강점으로 생각해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르노삼성 사장으로 부임한 2011년 8월 회사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상반기까지 적자였고 이런 식으로 가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13년 만에 적자로 전환할 것 같았다. 프로보 사장은 ‘왜 나 같은 젊은 사람을 이곳으로 보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는 “일단 한국과 한국 시장에 대해 많이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을 즐겨 먹는 한국형 CEO

[비즈&라이프] 회의 때마다 "빨리빨리" 외치는 한국형 CEO 프랑수아 프로보 르노삼성자동차 사장
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현장 경영이었다. 부임 직후부터 1년 반 동안 100여개의 전국 영업지점을 모두 돌았다. “사무실에 앉아 보고받는 것보다 밖에서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야 느낌이 오기 때문”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약속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서울 가산동 본사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 때문에 르노삼성 본사 직원들은 프로보 사장의 일정을 꿰고 있을 정도가 됐다.

프로보 사장은 서양식을 즐겼던 전임 대표들과 달리 한국식을 고집했다. 특히 김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처음 김을 먹어봤다는 그는 “고소한 게 아주 맛있어 집에서도 김으로 식사할 정도”라고 말했다. “나중에 프랑스에서 김 사업을 해도 성공할 것 같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한다.

프로보 사장의 한국 사랑은 언어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은 ‘빨리빨리’다.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이 말에 숨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말을 매우 좋아해 ‘힘내라’거나 ‘잘해보라’는 뜻으로도 ‘빨리빨리’를 사용한다. 회의를 끝내는 그의 마무리 발언도 늘 ‘빨리빨리’다. 르노삼성 직원들 사이엔 ‘빨리빨리’가 격려성 메시지로 통한다. 프로보 사장이 “빨리빨리”를 외치면 직원들도 웃으면서 빨리빨리의 프랑스어인 “비트비트(vite vite)”로 응수한다.

매달 직원들에게 보내는 CEO 메시지 영상에도 프로보식 어록이 담겨 있다. 그는 영상을 녹화할 때마다 마무리는 한국어 구호로 끝낸다. 매년 바뀌는 회사 슬로건을 한국말로 또박또박 발음한다.

작년 9월 준대형 세단인 SM7 노바 출시 행사에선 3분 넘게 한국어로 인사말을 했다. 매주 토요일 두 시간씩 한국어 수업을 받고 하루 한 시간 집중 연습한 결과다.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 정도만 연발하는 여느 외국인 CEO와는 수준이 다르다. 프로보 사장은 “한국말을 잘하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한다”며 “이런 점을 직원들이 좋게 봐주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식 개방형 전략 통했다

[비즈&라이프] 회의 때마다 "빨리빨리" 외치는 한국형 CEO 프랑수아 프로보 르노삼성자동차 사장
한국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수출이 꺾이고 내수까지 줄면서 르노삼성은 2012년까지 2년 연속 적자를 냈다. 2010년 15만6000대이던 내수 판매는 이듬해 11만대로 떨어졌고, 2012년엔 5만9000대까지 곤두박질쳤다.

프로보 사장은 비관하지 않았다. 업무와 개인 생활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일하는 한국 직원들을 보고 반드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또 “프랑스 사람으로서 한국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철저히 한국에 맞는 맞춤식 방안을 짰다. 우선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한국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형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내수시장이 좁기 때문이다. 바로 수출할 수 있는 물량을 본사에서 따왔다. 일본 공장에서 만들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로그를 한국에서 생산하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작년부터 2019년까지 북미지역으로 연 8만대 이상 로그를 수출할 수 있게 됐다.

해외 조달 전략도 주효했다. 모두 말렸지만 그는 스페인 공장에서 소형 SUV인 QM3를 들여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누구는 시끄러워서 안 되고 누구는 한국에선 절대 통할 수 없다고 뜯어말렸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QM3는 디자인 측면에선 수입차 느낌을 살리면서 가격은 2000만원대 초반으로 국산차 수준이라 지난해 국내에서 1만8000대나 팔렸다. 그의 한국식 개방형 전략으로 르노삼성은 2013년 444억원의 영업이익을 내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지난해엔 2007년 이후 최대인 1475억원의 이익을 거뒀다.

공무원 박차고 나온 영업맨 출신 CEO

그가 처음부터 자동차 회사에 다녔던 건 아니다.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니크와 파리 국립광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요즘 말로 잘나간다는 융합형 인재에 속했다. 파리에서 자란 파리지앵의 엘리트 코스대로 처음엔 그는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1994년 프랑스 재정경제부에서 공직자로 첫발을 내디뎌 5년 만에 국방부 장관 보좌관으로 영전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8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2002년 34세 나이에 르노에 입사했다. “공직에 비해 자동차 회사 업무가 ‘빡세기(demanding)’ 때문”이란 게 그가 밝힌 전직 이유였다. 책상머리에 앉아 문서나 작성하던 공무원 출신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불렸다. 2003년 파리 시내 한 영업지점장으로 있으면서 월 150대를 판매하며 영업왕에 올랐다. 르노 입사 2년 만에 프랑스 지역본부 판매 총괄에 올랐고 2008년엔 글로벌 영업 및 마케팅 전략 기획 담당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어찌 보면 그의 첫 위기는 한국에서 시작된 셈이었다. 인생 최대의 고비가 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는 순항 중이다. 그래도 과제는 남아 있다. 그동안 스페인에서 만든 QM3와 일본에서 개발한 로그로 재미를 봤다면 이제는 르노삼성에서 직접 만든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첫 시험대는 내년 중 출시 예정인 신형 SM5와 QM5다. 프로보 사장은 “르노삼성이 개발을 주도하는 SM5와 QM5 판매량을 늘려 좋은 흐름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프로필

△1968년 프랑스 파리 출생 △1991년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니크 졸업 △1994년 파리 국립광업학교 졸업 △1994년 프랑스 재정경제부 재무팀 선임 사무관 △1999년 프랑스 국방부 장관 보좌관 △2002년 르노 본사 입사 △2004년 르노 본사 지역본부 판매 총괄 △2005년 르노닛산 포르투갈법인 영업 총괄 △2008년 르노 본사 글로벌 영업 및 마케팅 담당 △2010년 르노 러시아법인 부사장 △2011년 9월 르노삼성자동차 사장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