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C 공작기계 세계시장 50% 점유…산업용 로봇 개발해 대중화 주도…광적인 R&D 집착…불황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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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산업용 로봇제조사 日 화낙 창업자 겸 명예회장
이나바 세이우에몬
이나바 세이우에몬
세계 최대 산업용 로봇 제조사인 일본의 화낙(ファナック).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기업은 최근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행동주의 헤지펀드 서드포인트의 대니얼 로엡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월 이 회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다. 헤지펀드의 큰손 로엡 CEO는 “화낙의 제품에 대한 열의는 애플을 연상시킨다”며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주주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수익을 돌려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낙은 일반인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베일에 싸인 기업으로 유명하다. 회사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다. 외부인은 후지산이 지척에 보이는 화낙 본사 정문에서 막힌다. 외부와의 이메일 교환은 특별한 암호화 장치를 쓰는 고객으로만 한정된다. 그 외에는 팩스를 써야 한다. 회사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전쟁에서 탱크와 부대의 위치를 적에게 노출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CNC 국산화해 세계 시장 50% 차지
화낙을 시가총액 6조3700억엔(약 58조원)의 글로벌 공작기계·산업용 로봇 제조사로 키운 사람은 이나바 세이우에몬 창업자 겸 명예회장(89)이다. 그는 원래 일본 전자회사 후지쓰의 평범한 사원이었다. 1955년 후지쓰가 사내 벤처 형태로 공장 자동화 분야에 진출하면서 도쿄공업대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그를 팀장으로 내세운 게 화낙의 출발점이 됐다. 화낙(Fanuc)이란 이름은 공장자동화수치제어(Factory Automation Numerical Conrol)를 줄인 말이다.
그는 미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를 국산화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CNC는 사람이 직접 금속을 깎을 필요 없이, 컴퓨터로 수치를 입력하면 기계가 자동으로 금속을 가공하는 공작기계다. 정밀 금속 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은 이를 만들지 못했다. 냉전 시대에는 공산권 수출이 금지된 품목이었을 정도로 중요한 기계 장치였다.
한번 CNC를 개발하고나자 화낙은 무서운 속도로 세를 늘려갔다. 국내 시장의 80%를 단숨에 차지했다. 1982년에는 세계 CNC 시장 점유율이 50%에 달했다. 자체적으로 CNC를 만드는 독일 지멘스가 화낙 제품의 유럽 시장 독점 판매권도 따내자 1985년 유럽경제위원회가 독과점에 해당한다며 84만달러의 과징금을 화낙에 부여했을 정도다. 샐 스파다 아크어드바이저리그룹 애널리스트는 “초정밀 가공을 위한 최고가 제품에서는 지멘스 CNC가 아직 우위를 갖고 있지만, 화낙은 세계 정상급 정밀도의 CNC를 부담없는 가격에 팔면서 시장을 휩쓸었다”고 설명했다. 애플 아이폰의 알루미늄 몸체도 화낙의 CNC로 가공된다.
‘로봇의 황제’, 경영도 황제 스타일로
이나바 창업자는 ‘로봇의 황제’로 불린다. 요즘엔 흔히 볼 수 있는 로봇 팔이 움직여 자동차를 조립하는 공장의 모습은 그가 만들어 냈다. CNC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화낙이 산업용 로봇에 뛰어든 것은 1975년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러나 6년 만인 1981년, 일본 야마나시현에 세운 공장에서 로봇과 CNC로 로봇 부품을 만드는 모습을 시연해보이자 세상은 깜짝 놀랐다. 500명이 필요했을 공장이 100여명 만으로 돌아가면서다. 기업들은 그제서야 산업용 로봇의 유용성을 깨달았다. 현재 미국 제너럴모터스(GM)나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세계 각국 공장에서는 화낙의 로봇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제’라는 말은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의 통제 하에 있어야 했다. 고객과의 회의 시간에 부하 직원은 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영업사원은 1만엔(약 9만원) 이하의 거래도 그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신입사원 선발이나 임원 승진도 모두 그가 직접 하나하나 확인했다.
화낙을 상징하는 노란색도 “동양에선 노랑은 황제를 상징한다”는 이유에서 정해졌다. 화낙에선 모든 게 노란색이다. 건물은 물론 로봇, 직원복, 회사 홈페이지까지 모든 게 샛노란색이다.
직원들에겐 최상의 복지를 제공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미 회사 내에 병원과 체육관, 25m 길이에 따뜻한 물로 채워진 수영장, 문화센터,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다.
R&D와 비용 절감에 사활 걸어
연구개발(R&D)에 대한 집요함은 그의 또 다른 특징이다. 화낙의 제품개발연구소에는 10분 일찍 가는 시계가 걸려 있다. 항상 남들보다 한발짝 앞서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암시였다. 그는 “화낙의 제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성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싸야 한다”고 즐겨 말한다. 가장 좋아하는 말은 독일 엔지니어링 업계에서 많이 쓰이는 ‘보다 적은 부품(weniger teile)’이란 말이다. 부품이 적어야 자동화해서 조립하기 쉽고 생산 단가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화낙이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R&D와 비용 절감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은 화낙이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호황기가 끝나고 1990년대가 되자 화낙에도 시련이 닥쳤다. 엔화는 초강세를 띠었다. 가격 경쟁력이 낮아졌다. 일본 경제는 거품이 터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싼 노동력은 또 다른 위협이었다.
비용 압박이 커졌지만 그는 공장을 해외로 옮기지 않았다. 기술로 비용을 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화낙이 생산한 자동화 로봇을 투입해 공장 효율성을 높였다. 지금 화낙 공장에선 로봇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720시간 연속으로 공장이 가동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화낙 버클리 연구소’를 세우는 등 R&D 투자를 줄이지 않은 것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요인이 됐다.
그는 2000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아들인 이나바 요시하루가 CEO가 됐다. 하지만 이나바 창업자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해 3월까지의 연간 매출은 4510억엔(약 4조1400억원), 영업이익은 1641억엔(약 1조5000억원)으로 제조업임에도 영업이익률이 36%를 넘는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화낙은 일반인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베일에 싸인 기업으로 유명하다. 회사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다. 외부인은 후지산이 지척에 보이는 화낙 본사 정문에서 막힌다. 외부와의 이메일 교환은 특별한 암호화 장치를 쓰는 고객으로만 한정된다. 그 외에는 팩스를 써야 한다. 회사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전쟁에서 탱크와 부대의 위치를 적에게 노출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CNC 국산화해 세계 시장 50% 차지
화낙을 시가총액 6조3700억엔(약 58조원)의 글로벌 공작기계·산업용 로봇 제조사로 키운 사람은 이나바 세이우에몬 창업자 겸 명예회장(89)이다. 그는 원래 일본 전자회사 후지쓰의 평범한 사원이었다. 1955년 후지쓰가 사내 벤처 형태로 공장 자동화 분야에 진출하면서 도쿄공업대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그를 팀장으로 내세운 게 화낙의 출발점이 됐다. 화낙(Fanuc)이란 이름은 공장자동화수치제어(Factory Automation Numerical Conrol)를 줄인 말이다.
그는 미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를 국산화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CNC는 사람이 직접 금속을 깎을 필요 없이, 컴퓨터로 수치를 입력하면 기계가 자동으로 금속을 가공하는 공작기계다. 정밀 금속 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은 이를 만들지 못했다. 냉전 시대에는 공산권 수출이 금지된 품목이었을 정도로 중요한 기계 장치였다.
한번 CNC를 개발하고나자 화낙은 무서운 속도로 세를 늘려갔다. 국내 시장의 80%를 단숨에 차지했다. 1982년에는 세계 CNC 시장 점유율이 50%에 달했다. 자체적으로 CNC를 만드는 독일 지멘스가 화낙 제품의 유럽 시장 독점 판매권도 따내자 1985년 유럽경제위원회가 독과점에 해당한다며 84만달러의 과징금을 화낙에 부여했을 정도다. 샐 스파다 아크어드바이저리그룹 애널리스트는 “초정밀 가공을 위한 최고가 제품에서는 지멘스 CNC가 아직 우위를 갖고 있지만, 화낙은 세계 정상급 정밀도의 CNC를 부담없는 가격에 팔면서 시장을 휩쓸었다”고 설명했다. 애플 아이폰의 알루미늄 몸체도 화낙의 CNC로 가공된다.
‘로봇의 황제’, 경영도 황제 스타일로
이나바 창업자는 ‘로봇의 황제’로 불린다. 요즘엔 흔히 볼 수 있는 로봇 팔이 움직여 자동차를 조립하는 공장의 모습은 그가 만들어 냈다. CNC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화낙이 산업용 로봇에 뛰어든 것은 1975년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러나 6년 만인 1981년, 일본 야마나시현에 세운 공장에서 로봇과 CNC로 로봇 부품을 만드는 모습을 시연해보이자 세상은 깜짝 놀랐다. 500명이 필요했을 공장이 100여명 만으로 돌아가면서다. 기업들은 그제서야 산업용 로봇의 유용성을 깨달았다. 현재 미국 제너럴모터스(GM)나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세계 각국 공장에서는 화낙의 로봇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제’라는 말은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의 통제 하에 있어야 했다. 고객과의 회의 시간에 부하 직원은 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영업사원은 1만엔(약 9만원) 이하의 거래도 그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신입사원 선발이나 임원 승진도 모두 그가 직접 하나하나 확인했다.
화낙을 상징하는 노란색도 “동양에선 노랑은 황제를 상징한다”는 이유에서 정해졌다. 화낙에선 모든 게 노란색이다. 건물은 물론 로봇, 직원복, 회사 홈페이지까지 모든 게 샛노란색이다.
직원들에겐 최상의 복지를 제공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미 회사 내에 병원과 체육관, 25m 길이에 따뜻한 물로 채워진 수영장, 문화센터,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다.
R&D와 비용 절감에 사활 걸어
연구개발(R&D)에 대한 집요함은 그의 또 다른 특징이다. 화낙의 제품개발연구소에는 10분 일찍 가는 시계가 걸려 있다. 항상 남들보다 한발짝 앞서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암시였다. 그는 “화낙의 제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성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싸야 한다”고 즐겨 말한다. 가장 좋아하는 말은 독일 엔지니어링 업계에서 많이 쓰이는 ‘보다 적은 부품(weniger teile)’이란 말이다. 부품이 적어야 자동화해서 조립하기 쉽고 생산 단가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화낙이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R&D와 비용 절감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은 화낙이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호황기가 끝나고 1990년대가 되자 화낙에도 시련이 닥쳤다. 엔화는 초강세를 띠었다. 가격 경쟁력이 낮아졌다. 일본 경제는 거품이 터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싼 노동력은 또 다른 위협이었다.
비용 압박이 커졌지만 그는 공장을 해외로 옮기지 않았다. 기술로 비용을 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화낙이 생산한 자동화 로봇을 투입해 공장 효율성을 높였다. 지금 화낙 공장에선 로봇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720시간 연속으로 공장이 가동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화낙 버클리 연구소’를 세우는 등 R&D 투자를 줄이지 않은 것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요인이 됐다.
그는 2000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아들인 이나바 요시하루가 CEO가 됐다. 하지만 이나바 창업자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해 3월까지의 연간 매출은 4510억엔(약 4조1400억원), 영업이익은 1641억엔(약 1조5000억원)으로 제조업임에도 영업이익률이 36%를 넘는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