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 늘린 원천은 식민전쟁 아닌 자유무역…자본주의가 제국주의 팽창시켰다는 건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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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8> 19세기 제국주의 원인
패권경쟁 치열했던 1800년대는 경제에 정부개입 많던 중상주의시대
被지배국에 자본투자도 거의 안해
제국주의 거부했던 獨 비스마르크, 정치적 입지 세울 기회로 활용하기도
패권경쟁 치열했던 1800년대는 경제에 정부개입 많던 중상주의시대
被지배국에 자본투자도 거의 안해
제국주의 거부했던 獨 비스마르크, 정치적 입지 세울 기회로 활용하기도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것만큼 커다란 오해도 없는 것 같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은 그야말로 제국주의 시대였다. 영국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서방 열강은 앞다퉈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의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 결과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약 87%가 서방 열강의 식민지가 됐다. 이런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을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오해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존 앳킨슨 홉슨의 영향 때문이다. 1902년 출판한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Imperialism:A Study)에서 그는 자본주의에서 소득과 부(富)가 소수의 부자에게 편중돼 부자들에 의한 과잉 저축과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과소 소비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팔리지 않는 생산물이 많아져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식민지 개척을 종용해 제국주의가 확장된다고 했다.
그 후 1915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홉슨의 주장을 발전시켜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단계(Imperialism: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됐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억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원인이라면 홉슨과 레닌의 주장처럼 각국이 식민지에 자본 투자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최대 제국을 형성한 영국은 해외 투자 중 절반 이상을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과 자치령에 투자했고, 프랑스는 전체 해외 투자의 10%도 식민지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러시아와 유럽의 다른 국가에 투자했다. 독일의 식민지 투자도 매우 미미했다.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일본, 미국은 실제로는 순채무국이었다.
19세기 말에 제국주의가 팽창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적대적 민족주의와 결합한 극단적인 정치적 행태 때문이었다. 당시 열강들은 권력의 확대와 통치의 이익을 얻기 위해 기업과 자본의 이익에 반함에도 식민지를 만들어갔다. 영국에서 정치활동 초기에 제국주의에 반대한 보수당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제국주의자로 변모한 이유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간 것은 통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1870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해 손상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가 위신을 앙양하기 위함이었다.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처음에는 제국주의를 거부했다. 그는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산업화에 뒤떨어진 독일로선 해외시장 개척보다는 국내 산업 육성이 더 긴급하고, 무분별한 식민지 쟁탈전은 오히려 국력을 소모할 위험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내부 모순과 문제에 직면하자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독일 내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으로 전환했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증명된다. 로마, 알렉산더, 잉카제국, 고대 중국 등은 수많은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제국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훨씬 몇 세기 전의 일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은 식민지 강대국들로 제국주의의 전형이었다. 그 시대는 자본주의가 아닌 중상주의 시대였다.
중상주의 사상에 기초해 각국은 식민지를 확보해 나갔다. 모든 국가가 관세, 수입 규제, 식민지 획득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수입은 억제하고 수출은 장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국가를 번영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손해와 불행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유럽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정책에 반대했다. 그들은 자유무역, 규제 완화,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이런 이론에 따라 중상주의의 대표적인 규제였던 영국의 곡물법과 항해 조례가 철폐됐다.
그 후 영국 경제는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고, 산업혁명으로 일어난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 경제의 발전에 자극받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이 자유무역 조치를 취하면서 국가 간 우의가 돈독해졌다. 사람들은 자발적 거래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 국가의 부를 증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의 부를 늘리는 방법은 정복과 전쟁이 아닌 상호 교환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1870년대 이후부터 깨지기 시작해 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제국주의적 노력을 한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에 비춰볼 때 허구다. 자본가들은 해외에 투자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낙후한 지역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자본가들은 무자비한 강제력이 아닌 높은 임금을 제공하며 외국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높은 임금으로 외국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개선된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익을 위한 체제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제국주의를 거부한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역과 교환이 증가하고 경제 통합이 이뤄지는 세계화를 자본주의에 의한 제국주의 확산이라고 비난한다.
제국주의 택한 영국, 정치적 계산 있었다
19세기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사진)는 제국주의자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1875년 수에즈운하를 사들여 이집트 지배와 중동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하기 이전까지는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1852년 디즈레일리가 “식민지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이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정치는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식민지 확장에 부정적이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식민지 무역의 독점은 식민지의 번영을 둔화하고 억제할 뿐만 아니라 모국의 부와 주민의 소득 증진에 반(反)하기 때문에 영국은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디즈레일리는 생각을 바꿔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했고,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황제로 추대하는 법을 통과시켜 인도 지배를 강화하며 여왕의 신임을 얻고 백작 작위까지 받았다.
디즈레일리는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오스만제국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는 대양 진출을 위한 부동항 확보를 위해 1783년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오스만제국과 전쟁하며 남하정책을 추진했다.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1875년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든 불가리아를 유혈진압하면서 많은 기독교인 사상자를 낸 사태를 들어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지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했다. 디즈레일리는 그런 도덕률보다는 영국의 이익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지지한다는 협정을 통해 키프로스 섬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등 식민지에서 일어난 폭동과 국내 경제의 악화로 1880년 총선에서 패하자 디즈레일리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당시 디즈레일리를 주축으로 영국이 제국주의를 택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존 앳킨슨 홉슨의 영향 때문이다. 1902년 출판한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Imperialism:A Study)에서 그는 자본주의에서 소득과 부(富)가 소수의 부자에게 편중돼 부자들에 의한 과잉 저축과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과소 소비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팔리지 않는 생산물이 많아져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식민지 개척을 종용해 제국주의가 확장된다고 했다.
그 후 1915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홉슨의 주장을 발전시켜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단계(Imperialism: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됐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억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원인이라면 홉슨과 레닌의 주장처럼 각국이 식민지에 자본 투자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최대 제국을 형성한 영국은 해외 투자 중 절반 이상을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과 자치령에 투자했고, 프랑스는 전체 해외 투자의 10%도 식민지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러시아와 유럽의 다른 국가에 투자했다. 독일의 식민지 투자도 매우 미미했다.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일본, 미국은 실제로는 순채무국이었다.
19세기 말에 제국주의가 팽창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적대적 민족주의와 결합한 극단적인 정치적 행태 때문이었다. 당시 열강들은 권력의 확대와 통치의 이익을 얻기 위해 기업과 자본의 이익에 반함에도 식민지를 만들어갔다. 영국에서 정치활동 초기에 제국주의에 반대한 보수당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제국주의자로 변모한 이유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간 것은 통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1870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해 손상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가 위신을 앙양하기 위함이었다.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처음에는 제국주의를 거부했다. 그는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산업화에 뒤떨어진 독일로선 해외시장 개척보다는 국내 산업 육성이 더 긴급하고, 무분별한 식민지 쟁탈전은 오히려 국력을 소모할 위험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내부 모순과 문제에 직면하자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독일 내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으로 전환했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증명된다. 로마, 알렉산더, 잉카제국, 고대 중국 등은 수많은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제국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훨씬 몇 세기 전의 일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은 식민지 강대국들로 제국주의의 전형이었다. 그 시대는 자본주의가 아닌 중상주의 시대였다.
중상주의 사상에 기초해 각국은 식민지를 확보해 나갔다. 모든 국가가 관세, 수입 규제, 식민지 획득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수입은 억제하고 수출은 장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국가를 번영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손해와 불행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유럽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정책에 반대했다. 그들은 자유무역, 규제 완화,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이런 이론에 따라 중상주의의 대표적인 규제였던 영국의 곡물법과 항해 조례가 철폐됐다.
그 후 영국 경제는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고, 산업혁명으로 일어난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 경제의 발전에 자극받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이 자유무역 조치를 취하면서 국가 간 우의가 돈독해졌다. 사람들은 자발적 거래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 국가의 부를 증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의 부를 늘리는 방법은 정복과 전쟁이 아닌 상호 교환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1870년대 이후부터 깨지기 시작해 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제국주의적 노력을 한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에 비춰볼 때 허구다. 자본가들은 해외에 투자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낙후한 지역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자본가들은 무자비한 강제력이 아닌 높은 임금을 제공하며 외국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높은 임금으로 외국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개선된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익을 위한 체제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제국주의를 거부한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역과 교환이 증가하고 경제 통합이 이뤄지는 세계화를 자본주의에 의한 제국주의 확산이라고 비난한다.
제국주의 택한 영국, 정치적 계산 있었다
19세기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사진)는 제국주의자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1875년 수에즈운하를 사들여 이집트 지배와 중동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하기 이전까지는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1852년 디즈레일리가 “식민지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이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정치는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식민지 확장에 부정적이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식민지 무역의 독점은 식민지의 번영을 둔화하고 억제할 뿐만 아니라 모국의 부와 주민의 소득 증진에 반(反)하기 때문에 영국은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디즈레일리는 생각을 바꿔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했고,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황제로 추대하는 법을 통과시켜 인도 지배를 강화하며 여왕의 신임을 얻고 백작 작위까지 받았다.
디즈레일리는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오스만제국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는 대양 진출을 위한 부동항 확보를 위해 1783년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오스만제국과 전쟁하며 남하정책을 추진했다.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1875년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든 불가리아를 유혈진압하면서 많은 기독교인 사상자를 낸 사태를 들어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지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했다. 디즈레일리는 그런 도덕률보다는 영국의 이익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지지한다는 협정을 통해 키프로스 섬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등 식민지에서 일어난 폭동과 국내 경제의 악화로 1880년 총선에서 패하자 디즈레일리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당시 디즈레일리를 주축으로 영국이 제국주의를 택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