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 해고나 실직 걱정에서 벗어난 안정된 직업 공무원이 최고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9급 공무원을 선망한다. 정부와 여당이 지난해부터 공무원연금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 인기는 좀처럼 식지 않는다. 그야말로 9급 공무원 시대다.
서울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
서울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
대한민국이 ‘9급 공무원’에 열광하고 있다. 공무원 열풍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등학생들은 언제부터인가 장래 희망 난에 ‘공무원’을 적고 있고 대학 졸업 후 취업 전쟁에 치인 취업 준비생들은 노량진(공무원 학원 밀집 지역)으로 향한다. 결혼 적령기 미혼 남녀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의 직업 역시 공무원이다. 경기 침체의 여파가 사상 최악의 고용 불안과 취업난으로 이어진 가운데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업으로 분류되는 공무원이 각광받는 것이다.

급수는 상관없다. 오히려 가장 낮은 급수인 ‘9급’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린다. 실제로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해 9급 국가직 공무원 공개 채용 시험에는 19만987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평균 51.6 대 1에 달한다. 심지어 2013년에는 무려 20만4698명이 몰리기도 했다. 이 같은 9급 공무원 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도전 정신을 잃어버린 인재들이 그저 안정적인 데 안주하기 위해 긴 시간을 투자하며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9급 공무원을 꿈꾸는 ‘공시족(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다.

9급 공무원 열풍에도 트렌드가 있다. 최근에는 40대 초·중반, 30대 전후의 직장인, 주부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등 늦깎이 공무원 도전자가 늘고 있다.

우선 이미 은퇴를 시작한 40대 초·중반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 9급 공무원은 최고의 노후 대책이다. 한물간 노장 취급을 받으며 직장을 떠난 중년들에게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국내 경기가 장기 침체 국면에 빠진 가운데 창업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 응시 연령 상한제 폐지(2009년)’는 그야말로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이후 중·장년 공시족이 해마다 늘고 있다. 40대 이상 9급 공무원 시험 접수 인원은 ▷연령 제한 폐지 후 첫해인 2010년 2924명 ▷2011년 3402명 ▷2012년 4446명 ▷2013년 7984명 ▷2014년 8638명 ▷2015년 8817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0년 2.07%에 불과했던 40대 이상 공시족의 비중은 올해 4.62%까지 치솟았다.
9급 공무원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2009년 응시 연령 제한 폐지

준비생이 많다고 합격률까지 높은 것은 아니다. 2013년에는 99명, 2014년에는 92명만 합격했다. 자녀 부양에 대한 부담이 그대로인 가운데 생업을 포기하고 시험 준비에 몰두할 수 없다 보니 합격률이 저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13년 서울시 일반 행정직 9급에 합격한 49세 윤모 씨는 “평일에는 택배 일을 하고 일요일 하루 종일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시험 준비를 했다”며 “18개월 동안 택배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시험을 2개월 남기고서야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30대 초·중반 대졸 직장인들도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떠나려고 한다. 경영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직원만이 아니다. 바늘구멍을 뚫고 대기업에 취업한 ‘능력자’도 짐을 싸고 있다.

“대기업도 평생직장은 아니더라고요.” 9급과 7급 공무원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3년 차 직장인 오모(33) 씨의 말이다. 오 씨도 1년 전까지는 희망에 들뜬 신입 사원이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오 씨는 2013년 국내 10대 건설사 중 하나인 A건설에 취업했다. 기쁨도 잠시, 지나치게 경쟁적이며 충성스러운 사내 분위기 속에서 야근과 철야가 끊이지 않았다. ‘월화수목금금금.’ 주말도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개인적인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고용도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희망퇴직’의 압박에 정년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한솥밥 먹던 선배들이 50세도 안 돼 짐을 싸 회사를 나가는 걸 지켜본 오 씨는 마음을 굳혔다. 최근 오 씨는 출퇴근 시간과 쉬는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는 비단 오 씨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젊은 직장인들은 더 이상 높은 임금에 목매지 않는다. 조금 덜 벌더라도 적절한 휴식과 안정적인 생활을 원한다. 그들이 공무원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시간 선택제 공무원’ 꿈꾸는 경단녀들

마지막으로 주부 ‘경단녀’들도 9급 공무원 전쟁에 가세했다. 일과 육아 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승부수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재취업 문제는 최근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결혼한 여성 5명 중 1명이 직장을 포기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역별 고용 조사’ 중 경력 단절 여성 통계에 따르면 2014년 4월 기준 15~54세 기혼 여성은 956만1000명이다. 이 중 결혼, 임신·출산, 육아, 자녀 교육(초등학생), 가족 돌봄 등의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경력 단절 여성은 213만9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체 기혼 여성의 22.4%다. 진화에 나선 정부는 ‘시간 선택제 공무원’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시간 선택제 공무원은 일반 공무원의 통상적 근무시간(1일 8시간, 주 40시간)보다 짧게 근무(1일 4시간, 주 20시간, 근무시간 별도 지정)하는 공무원으로 지난해 처음 도입됐다.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 공무원이고 보수는 근무시간에 비례해 지급된다. 응시 자격 및 시험 과목은 일반직 공무원과 동일하다.
한 공무원 시험 설명회에 참석한 수험생들이 ‘공무원 임용 시험 계획’을 살피고 있다.
한 공무원 시험 설명회에 참석한 수험생들이 ‘공무원 임용 시험 계획’을 살피고 있다.
경단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5급 이하 국가공무원 208명 모집에 5084명이 지원하며 평균 24.4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하반기에도 166명 모집에 3473명이 응시해 평균 20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육아 등 개인 사정에 따라 근로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게 경단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상반기 시간 선택제 공무원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주부 강은정(32) 씨는 “경복궁역 서울지방경찰청에 지원했는데 관련 분야 경력이 많지 않았던 게 패인이었던 것 같다”며 “기회가 된다면 올해도 한 번 더 9급 공무원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부는 2015년 시간 선택제 공무원의 채용 규모를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정확한 선발 인원과 시험 계획 등은 5∼6월 중 공고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부는 시간 선택제 공무원 채용 요건을 현재 ‘퇴직 후 3년이 경과되지 않은 사람’에서 ‘퇴직 후 6년이 경과되지 않은 사람’으로 완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9급 공무원이 대체 뭐기에 이처럼 열풍일까.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최대 65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9급 공무원 월급 수준은 표면적으로는 높지 않다. 2015년 기준 9급 1호봉은 127만4249원이다. 2014년 122만7600원에서 3.8% 인상됐다. 하지만 수당이라는 게 있다. 정액 급식비(매월 13만 원), 가족수당(배우자 월 4만 원+자녀 1인 월 2만 원), 직급 보조비(10만5000원), 정근 수당(근무 연수에 따라 차등 지급), 자녀 학비 보조 수당(고등학교 재학 자녀가 있는 공무원에게 수업료 등 일부 지급) 등 복리후생을 위한 수당과 실비가 짭짤하다. 여기에 시간외근무수당·야근수당·휴일근무수당·특수지근무수당 등 일정하지 않은 수당들까지 포함하면 중소기업의 초봉 수준(연봉 2000만 원 이상)은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매년 호봉이 올라갈 때마다 약 5~6%씩 상승하는 임금은 덤이다.

이 밖에 진입 장벽이 낮다는 것도 매력이다. 공무원 시험에는 학력 제한이 없고 토익 점수와 자격증도 필요 없다(가산점으로 적용되는 것 제외). 공무원 시험이 ‘현대판 과거시험’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9급 공무원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업무 강도, 보직에 따라 큰 차이

최근 도마 위에 올라 있는 공무원연금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무원연금은 대표적인 특수직역연금이다. 현행 공무원연금법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신규 임용된 9급 공무원이 30년 재직 후 6급으로 퇴직했을 때 월 140만 원의 연금을 받게 된다. 국민연금 최고 수령액(월 140만 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전체 공무원연금 수령자들의 평균 수령액은 이보다 1.5배 많은 219만 원이다. 그만큼 고액 연금을 수령하는 공무원도 많다는 것이다. 결국 공무원연금법 개정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은 9급 공무원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한편 업무의 강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맡은 보직에 따라 차이가 크다. 다만 공직사회의 특성상 경쟁에서는 자유로운 편이다. 업무 특성상 성과를 계량해 확인하기 어렵다 보니 굳이 경쟁을 통해 성과를 낼 필요가 없다.

‘9급 공무원 열풍’에 대한 우려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이다. 최대 65세까지 보장되는 정년, 많지는 않아도 호봉에 따라 꾸준히 오르는 임금, 퇴직 후 삶을 보장해 주는 연금…. 가만히 곱씹어 보면 모두 개인적인 이익들이다. 대다수 ‘공시족’들이 국익보다 사익을 먼저 생각하며 공무원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사명감의 실종이다. 9급 공무원 열풍 속에서 한 번쯤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정다현 공무원연금개혁 국민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악화 일로의 경기 침체 상황 속에서 조금 더 안정적이고 편한 직장으로 공무원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하지만 공무원은 시민의 공복으로서 무엇보다 사명감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화 기자 kb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1010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