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밖 넘치는 아이디어 실현시켜라!"…'오픈 이노베이션'이 만든 의료기기 혁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Best Practice - 메드트로닉
의사들의 아이디어 현실화
인공디스크·이식형 심박동기 개발
의료기기 2위 업체로 급성장
'고객의 고객' 환자의 목소리 경청
1년에 한번 수술실 체험도 실시
"환자의 고통 봐야 아이디어 나와"
의사들의 아이디어 현실화
인공디스크·이식형 심박동기 개발
의료기기 2위 업체로 급성장
'고객의 고객' 환자의 목소리 경청
1년에 한번 수술실 체험도 실시
"환자의 고통 봐야 아이디어 나와"
올 1월 초대형 의료기기업체가 탄생했다. 2013년 기준 매출 점유율 3위인 메드트로닉(4.7%)이 5위 코비디엔(2.8%) 인수를 마무리 지으면서다. 현재는 세계 최대 의료기기업체인 존슨앤드존슨(점유율 7.8%)에 약간 뒤처져 있지만 2020년에는 메드트로닉이 존슨앤드존슨을 제치고 의료기기 시장 1위 기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렇다고 단순히 덩치가 큰 회사는 아니다. 메드트로닉은 매년 50~60개의 신제품을 꾸준히 내놓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연구개발(R&D) 중에서 연구는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개발에만 집중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메드트로닉이 최초로 개발한 심장박동기도 창업자가 한 외과의사의 고민을 접하면서 개발이 이뤄졌다. 의사가 낸 아이디어를 제품화
메드트로닉은 1949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차고에서 설립됐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얼 바켄과 그의 처남인 파머 허먼슬리가 세운 의료기기 수리점이었다. 본격적으로 메드트로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0년대 중반 미네소타대 외과의사였던 월튼 릴레이 박사와 연결돼면서다.
당시 릴레이 박사는 깊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정전으로 병원에서 수술받던 신생아의 몸에 연결된 인공 심장박동기의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아이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체외 심장박동기는 부피가 엄청났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외부 전극에 의존해야 했는데 정전이라도 나면 작동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릴레이 박사의 고민은 근처에서 수리점을 운영하던 바켄을 만나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해결될 수 있었다. 약 4주 만에 수은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하는, 문고판 크기 책보다 크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심장박동기가 개발됐다. 미네소타대 연구소에서 테스트를 거친 뒤 다음날 바로 소아과 심장질환 환자들에게 적용됐다. 바켄의 심장박동기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심장박동기는 즉시 아이의 심장 박동을 거의 정상으로 회복시켰고, 며칠 안에 아이의 심장은 스스로 정상적인 리듬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자체 기술개발뿐 아니라 남의 기술도 적극 도입하자는 자세가 메드트로닉에 자리잡았다. 오늘날 기업들이 강조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의 정신이다. 세상에는 숨어 있는 아이디어가 많고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회사 연구소에서 머리를 짜내 개발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다.
미국 최초의 이식형 심장박동기 개발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미국에서 완전 이식형 심장박동기 설계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는 미국 버펄로에 있는 한 병원의 윌리엄 차르닥 박사와 앤드루 게이지 박사, 전기기사인 윌슨 그레이트배치가 만들었다. 세 사람이 2년 이상 연구해 1960년 발표한 논문을 본 메드트로닉 창업자들은 곧 이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공동 창업자인 허먼슬리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곧장 버펄로로 날아갔고 이들로부터 이식형 심장박동기 독점 생산권을 따냈다.
개발 2개월 만에 당시 375달러짜리 이식형 심장박동기 50개를 주문받았고, 이후 허먼슬리는 종종 자가용 비행기로 긴급 배달을 해야 할 정도로 주문이 쏟아졌다.
지금은 보편화된 척추 수술에 쓰이는 인공 디스크도 독일 베를린의 작은 정형외과 의사의 생각이었다. 올림픽 체조선수였지만 허리 디스크로 선수생활을 끝낸 뒤 의사가 돼 직접 병을 고치겠다며 낸 아이디어를 메드트로닉이 받아들이면서다. ‘고객의 고객’인 환자 목소리 들어라
물론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온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했다. 메드트로닉에는 약 1만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있다. 이들은 기존에 나온 제품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한편 주요 부품을 직접 설계하고 개발한다. 주요 부품 생산은 스위스, 싱가포르, 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 4곳으로만 한정한다. 아무리 비용을 아낄 수 있더라도 중국엔 아직 주요 부품 생산을 맡기지 않고 있다. 품질 관리를 위해서다.
남의 아이디어뿐 아니라 ‘고객의 고객’인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메드트로닉의 문화다. 1차 고객인 의사보다 의사의 고객이자 최종 고객인 환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메드트로닉은 직원들에게 의사보다 더 자주 환자를 만날 것을 당부한다. 회사의 미션도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시키며 생명을 연장시킨다’로 정해 놓았다. 이 미션을 회사 안의 벽, 홈페이지 등 곳곳에 반복 노출해 직원들이 절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1년 이상 근무한 직원에게는 최고경영자(CEO)가 미션이 새겨진 메달을 직접 전달하는 의식도 하고 있다.
병원 영업을 맡은 직원은 최소 1년에 한 번 수술실에 직접 들어간다. 환자의 생생한 고통과 어려움은 생생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라는 생각에서다. 매년 전 사원이 참석한 가운데 생사의 고비에서 벗어난 환자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직 농구 심판이던 데일 와카수키는 “내가 살아서 건강하게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수호천사라고 생각하는 여러분 덕분입니다”라는 감사의 인사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말에 자긍심을 넘어 전율을 느낀 직원들은 자신의 일이 단순히 의료기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된다.
메드트로닉은 2007년 ‘리더를 양성하는 글로벌 최고 기업 2007’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2011년에는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연구소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25대 다국적 기업’에도 이름을 올렸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그렇다고 단순히 덩치가 큰 회사는 아니다. 메드트로닉은 매년 50~60개의 신제품을 꾸준히 내놓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연구개발(R&D) 중에서 연구는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개발에만 집중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메드트로닉이 최초로 개발한 심장박동기도 창업자가 한 외과의사의 고민을 접하면서 개발이 이뤄졌다. 의사가 낸 아이디어를 제품화
메드트로닉은 1949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차고에서 설립됐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얼 바켄과 그의 처남인 파머 허먼슬리가 세운 의료기기 수리점이었다. 본격적으로 메드트로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0년대 중반 미네소타대 외과의사였던 월튼 릴레이 박사와 연결돼면서다.
당시 릴레이 박사는 깊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정전으로 병원에서 수술받던 신생아의 몸에 연결된 인공 심장박동기의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아이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체외 심장박동기는 부피가 엄청났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외부 전극에 의존해야 했는데 정전이라도 나면 작동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릴레이 박사의 고민은 근처에서 수리점을 운영하던 바켄을 만나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해결될 수 있었다. 약 4주 만에 수은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하는, 문고판 크기 책보다 크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심장박동기가 개발됐다. 미네소타대 연구소에서 테스트를 거친 뒤 다음날 바로 소아과 심장질환 환자들에게 적용됐다. 바켄의 심장박동기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심장박동기는 즉시 아이의 심장 박동을 거의 정상으로 회복시켰고, 며칠 안에 아이의 심장은 스스로 정상적인 리듬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자체 기술개발뿐 아니라 남의 기술도 적극 도입하자는 자세가 메드트로닉에 자리잡았다. 오늘날 기업들이 강조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의 정신이다. 세상에는 숨어 있는 아이디어가 많고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회사 연구소에서 머리를 짜내 개발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다.
미국 최초의 이식형 심장박동기 개발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미국에서 완전 이식형 심장박동기 설계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는 미국 버펄로에 있는 한 병원의 윌리엄 차르닥 박사와 앤드루 게이지 박사, 전기기사인 윌슨 그레이트배치가 만들었다. 세 사람이 2년 이상 연구해 1960년 발표한 논문을 본 메드트로닉 창업자들은 곧 이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공동 창업자인 허먼슬리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곧장 버펄로로 날아갔고 이들로부터 이식형 심장박동기 독점 생산권을 따냈다.
개발 2개월 만에 당시 375달러짜리 이식형 심장박동기 50개를 주문받았고, 이후 허먼슬리는 종종 자가용 비행기로 긴급 배달을 해야 할 정도로 주문이 쏟아졌다.
지금은 보편화된 척추 수술에 쓰이는 인공 디스크도 독일 베를린의 작은 정형외과 의사의 생각이었다. 올림픽 체조선수였지만 허리 디스크로 선수생활을 끝낸 뒤 의사가 돼 직접 병을 고치겠다며 낸 아이디어를 메드트로닉이 받아들이면서다. ‘고객의 고객’인 환자 목소리 들어라
물론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온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했다. 메드트로닉에는 약 1만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있다. 이들은 기존에 나온 제품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한편 주요 부품을 직접 설계하고 개발한다. 주요 부품 생산은 스위스, 싱가포르, 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 4곳으로만 한정한다. 아무리 비용을 아낄 수 있더라도 중국엔 아직 주요 부품 생산을 맡기지 않고 있다. 품질 관리를 위해서다.
남의 아이디어뿐 아니라 ‘고객의 고객’인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메드트로닉의 문화다. 1차 고객인 의사보다 의사의 고객이자 최종 고객인 환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메드트로닉은 직원들에게 의사보다 더 자주 환자를 만날 것을 당부한다. 회사의 미션도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시키며 생명을 연장시킨다’로 정해 놓았다. 이 미션을 회사 안의 벽, 홈페이지 등 곳곳에 반복 노출해 직원들이 절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1년 이상 근무한 직원에게는 최고경영자(CEO)가 미션이 새겨진 메달을 직접 전달하는 의식도 하고 있다.
병원 영업을 맡은 직원은 최소 1년에 한 번 수술실에 직접 들어간다. 환자의 생생한 고통과 어려움은 생생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라는 생각에서다. 매년 전 사원이 참석한 가운데 생사의 고비에서 벗어난 환자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직 농구 심판이던 데일 와카수키는 “내가 살아서 건강하게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수호천사라고 생각하는 여러분 덕분입니다”라는 감사의 인사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말에 자긍심을 넘어 전율을 느낀 직원들은 자신의 일이 단순히 의료기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된다.
메드트로닉은 2007년 ‘리더를 양성하는 글로벌 최고 기업 2007’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2011년에는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연구소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25대 다국적 기업’에도 이름을 올렸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