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MRO 시장, 매출 규모로 소비자 선택권 제한해선 안돼
대기업과의 경쟁으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시장 규제가 많은 논란을 빚자 동반성장위원회는 ‘상생협약’이라는 대안을 찾기로 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2011년부터 가이드라인으로 MRO 대기업의 영업을 제한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난해 11월 시한이 끝났다. 규제 연장 여부를 놓고 관련 업계의 찬반 의견이 맞서 왔다. 대기업은 영업 제한으로 수익에 타격을 입었고, 중소기업은 그 혜택이 중견 또는 외국계 기업에 넘어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실효성 없는 규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쪽과 더 강화한 규제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측이 부딪쳤다.

결국 동반위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연말까지 이 규제를 계속 적용하기로 했다. 가이드라인을 대체할 수 있는 상생협력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간을 주겠다는 조건이다.
[뉴스의 맥] MRO 시장, 매출 규모로 소비자 선택권 제한해선 안돼
이는 규제가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음에도 사실상 기간을 1년 더 연장한 것이다. 가이드라인이냐 상생협약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경쟁 환경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규제가 과연 바람직한지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만은 않다. 가이드라인이라는 규제를 상생협약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규제로 대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MRO산업 가이드라인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대기업의 사업영역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규제다. 대기업 계열 MRO 전문기업은 계열사 또는 연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과 거래할 수 있고 내부거래 비중이 낮은 경우 연매출 1500억원 이상 기업과 영업할 수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하고만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규제가 적용되고 대기업이 시장에서 철수한 뒤 3년이 지난 지금 중소기업조차 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분명 대기업의 영업력은 축소됐는데 시장에 남아 있는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어쩌면 더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인위적인 대기업 사업영역 제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삼성은 계열사인 아이마켓코리아를 인터파크에 매각했고, SK는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했으며, 한화 웅진 등 주요 대기업은 MRO사업을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했다. 규제 이전에 13개이던 대기업 계열 MRO 기업은 5개로 줄었다. 신규 사업이 제한된 상황에서 MRO 시장에서 대기업 계열 기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감소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문제는 이런 규제로 혜택을 받은 것이 중소기업인가 하는 점이다. MRO산업의 시장 규모는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는데 관련 중소기업의 매출 성장률은 오히려 큰 폭으로 낮아졌다. 2011년과 2014년의 매출 대비 수익률을 보면 수익성이 나아진 기업은 5곳이다. 상대적으로 큰 규모인 이지메디컴이 0.56%에서 2.54%로 2%포인트가량 이익률이 증가했지만 중소기업 최대 MRO업체인 큐브릿지는 1%도 채 되지 않은 영업이익률에 시달리다가 올초 인터파크에 넘어갔다. 오히려 5~6%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유지하던 중소기업들이 규제 이후에 수익성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모두 4%대로 떨어졌다. 규제 시행 결과 중소기업의 수익성이 나아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대기업이 퇴장한 시장에서 소수의 중견기업과 외국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높이면서 오히려 납품처를 잃은 중소기업 간 가격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장점유율 높이는 외국계 기업

대기업 규제에서 자유로운, 비교적 규모가 큰 중견기업은 경쟁자가 시장에서 퇴장하자 더 강력한 성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계 대기업 MRO사업자의 진입은 대부분 2011년 MRO 가이드라인 적용 이후에 이뤄졌다. 독일계 기업인 한국화스너와 일본의 미스미가 진입한 이후 외국계 기업의 전체 매출 성장률이 10%를 웃돌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을 인수하면서 진입하는 전략을 세운 미국의 그레인저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은 국내 MRO시장뿐만 아니라 생산자재 공급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계 기업의 공격적인 시장 잠식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MRO산업은 특성상 규모의 경제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의 쏠림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또 대항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외국계 대기업이 진입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장한 중견기업마저 규제하자는 주장이 나오면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은 계속 퇴출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마켓에 진출하려는 상황에서 외국 기업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규제를 신설할 수도 없다. 이런 규제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실력 있는 기업, 외국 기업을 시장에서 퇴장시키는 것으로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대안은 다시 시장을 경쟁원리에 맡기는 것이다. 대규모 MRO사업자와 중소 납품업체 간의 불공정한 거래행위가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의 성장에 장애물이 된다는 문제는 원천적으로 대기업을 경쟁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러 대기업과 실력 있는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기업 간 거래가 투명해져야 해결할 수 있다.

상생협약은 규제의 다른 이름

기업 규모에 따른 규제들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시장에 공급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로서 소비자가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가장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구입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가격은 금전적 지급 외에도 거래를 위한 시간과 노력을 모두 고려한 비용을 의미한다. 지금의 가이드라인에서 대기업 계열 MRO 기업은 일정 규모 이상 기업하고만 거래할 수 있다. 더 낮은 가격에 더 편리한 방법으로 자재를 공급받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매출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제한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상생협약이 가이드라인과 똑같은 규제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으려면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는, 진정한 자율적 협약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의 거래에서 적절한 역할 분담이 이뤄지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기업 스스로가 찾을 것이다. 경쟁력이 없다면 아무리 국내 기업이라도 소비자가 찾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은 정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기업들은 이미 알고 있다.

김미애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