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은 작년 말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하이닉스 본사가 자리 잡은 경기 이천의 주민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과거 어려웠던 하이닉스가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낸 데 대해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격려의 말이 적혀 있었다. 순간 박 사장은 코끝이 찡했다. 하이닉스가 어려울 때 이천 공장 주변 상가와 식당도 함께 어려움을 겪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하이닉스는 항상 불쌍한 기업, 법인세도 못 내는 기업으로 여겨졌는데 ‘그런 기업이 이렇게 컸구나’ 하고 격려해주시는 분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며 “그런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다시는 위기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그 순간을 회상했다.

“단 한판의 승부, 일척건곤(一擲乾坤)”

하이닉스는 요즘 1983년 창사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인 5조1095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영업이익률이 30%에 달했다. 덕분에 19년 만에 처음 법인세를 냈다. 과거에도 흑자를 낸 적이 있지만 그동안 적자가 워낙 많이 쌓여 법인세를 면제받다 지난해 대규모 흑자로 누적 적자를 모두 털어내면서 법인세 납부 대상이 됐다.

올 들어서도 1분기에만 1조5800억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냈다. 증권사들은 2분기에도 1조4000억~1조5000억원대 영업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연간 기준으로는 영업이익이 6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증시에서 시가총액은 삼성전자, 한국전력, 현대자동차에 이어 4위다. 최근에는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 조사에서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박 사장이 ‘경영 성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박 사장은 요즘 자나 깨나 ‘위기’를 외친다. 사상 최대 실적에 자만하다가는 언제 또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박 사장의 머릿속에는 아직 2000년대 쓰라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과 매각 추진 과정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하이닉스는 채권단 관리 체제를 겪으며 경쟁사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팔려갈 뻔하기도 했고, 21 대 1 감자를 당해 주가가 120원대까지 떨어지는 수모도 겪었다.

당시 하이닉스를 궁지로 몰아넣은 ‘메모리 반도체 치킨게임’은 이제 끝났고 하이닉스는 승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박 사장은 아직 안심이 안 된다고 했다. D램에서는 하이닉스가 삼성전자 못지않은 강자지만 기술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고 낸드플래시에선 10%대 점유율로 4, 5위권을 맴돌고 있어서다. 중국이 언제 도전자로 등장할지 모른다는 점도 걱정이다.

그는 지난해 “두 번만 기회를 놓쳐 버리면 힘을 잃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제때 만들지 못하면 한 번쯤은 그럭저럭 버텨낼지 몰라도 그런 일이 두 번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그는 ‘일척건곤’이란 말을 쓴다. 한 번의 선택으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단 한 번에 운명이 갈린다는 의미다. 그만큼 위기의식이 커졌다.

“스마트하고 독하게”

[비즈&라이프]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 "한 번만 기회 놓쳐도 나락"…일척건곤 승부수 던졌다
그는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1984년 입사했다. 이후 30년간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2013년 2월 하이닉스 사장에 올랐다. 현대전자 시절부터 통틀어 하이닉스 역사상 첫 정통 엔지니어 출신 CEO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반도체 공정을 제대로 알기 위해 당시 ‘런 시트(run sheet)’라고 불린 작업 지시서(매뉴얼) 수십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웠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지만 이론과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 반도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도 드문 시절이었다. 그는 “‘반도체’의 ‘반’자도 모를 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배웠다”고 했다. 연구원 시절 이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통근버스에서도 눈을 붙이는 대신 기술 서적을 읽고는 했다.

그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한 마디로 “스마트하고 독하게”라고 요약한다. ‘깊이 고민해 새로운 방안을 만들고(스마트), 목표 의식을 갖고 집요하게(독하게) 일하라’는 의미다. 세계 최강 삼성전자와 30년 넘게 경쟁하며 터득한 그만의 ‘2등이 1등을 이기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 직원 간담회에서 “회사의 정말 중요한 경쟁력은 인력 규모, 투자 규모가 아니라 스마트하고 독한 구성원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공장으로

현장 중시도 박 사장의 특징이다. 정통 엔지니어 출신답게 그는 현장에서 답을 찾는다. 2003년 이후 4년간의 메모리연구소장 시절, 그는 회의를 사무실 대신 ‘라인’에서 할 때가 많았다. 하이닉스 이천 공장 근처에 있는 메모리연구소에는 생산 라인과 비슷한 연구용 반도체 라인이 있는데 이곳이 그의 단골 회의 장소였다. 생산 현장에 필요한 기술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통근버스가 끊기는 밤 10시 반 이후에도 연구소에 남아 밤 늦게 일하는 직원들과 기술적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걸 즐겼다.

CEO가 된 지금도 대부분 시간을 이천 공장에서 보낸다. 서울 사무소에는 그룹 회의가 있을 때 등을 제외하면 거의 들르지 않는다. 한 직원은 “이천 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궁금한 게 있으면 담당 임직원을 사장실로 부르는 대신 직접 공장으로 내려갈 때가 많다”고 말했다.

문제 제기보다 문제 해결 중시

박 사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는 아니다. 오히려 내성적인 성격에 가깝다. 말수가 적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하이닉스 임원들은 박 사장의 리더십 핵심으로 ‘경청’을 꼽는다. 박 사장 자신도 직원들과 소통하는 비결 중 하나가 경청이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꺼린다. 일례로 그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만 명함에 ‘PhD(박사)’란 문구를 새기지 않는다. 주위에선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다.

업무에서는 협업을 강조한다. 문제 제기보다 문제 해결을 중시한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반도체는 수많은 공정이 얽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보다 협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게 박 사장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취미는 독서다. 가끔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러 머리를 식힌다. 존경하는 경영자는 고(故)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다. 기술에 인문학적 감성을 입힌 점을 높이 평가한다.

■ 박성욱 사장 프로필

△1958년 경북 포항 출생 △1982년 울산대 재료공학과 졸업 △1984·1992년 KAIST 재료공학 석·박사 △1984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반도체연구소 입사 △2001년 현대전자 미국 생산법인 이사 △2003년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메모리연구소장 △2007년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 △2012년 SK하이닉스 부사장(연구개발 총괄) △2013년 SK하이닉스 사장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