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이 넘는 기업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의 화학·의약회사 머크는 창업자 가문인 머크가(家)가 13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상장된 지분 외 회사 지분은 150명에 이르는 일가가 나눠갖고 있다. 자손 중 한 명이 머크 가족위원회 수장으로 지주회사를 이끌고 전문경영인이 각 계열사를 경영한다. 머크 가문 일원이라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고위직에 ‘지원’할 수 있다.

한국에서 롯데그룹 형제간 다툼처럼 소위 ‘왕자의 난’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가족경영 자체가 아니라 ‘가족경영 체제의 부재’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창업가문 구성원은 늘지만 승계에 명확한 기준이나 뚜렷한 원칙을 정해놓은 대기업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 자의든 타의든 형제 대부분이 일단 경영에 참여한 뒤 계열분리로 기업을 쪼개는 것이 수순이다. 2, 3세들은 주로 외국에서 공부하다 젊은 나이에 임원으로 입사해 경영 능력을 검증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능력을 기반으로 한 가족 간 합의가 아니라 아버지의 결정으로 후계자가 정해지면 다른 편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가족기업 내부 합의 과정은 물론 후계자의 경우 맞춤형 경영수업이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머크뿐 아니라 폭스바겐 BMW 등 자동차회사, 밀레와 같은 가전업체 등 자본집약적인 제조사들도 가족경영체제를 제대로 갖춘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방한한 프랑크 스탄겐베르크 하버캄프 당시 머크 회장은 “머크의 장수 비결은 회사의 이익을 가문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이 뿌리를 내린 데 있다”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이라고 말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