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는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선비정신은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지도자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ncerpeter@hankyung.com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는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선비정신은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지도자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ncerpeter@hankyung.com
서점가에 모처럼 ‘대통령 특수’가 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마음으로 공감했다”며 여름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하면서다. 이 책은 단숨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정치·사회 부문 1위에 올랐고, 종합 순위에서도 10위권에 진입했다. 미국인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가 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 그것이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잘 기술한 책”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비교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그 우수성과 가능성을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찾는다. 경기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도서관 ‘지혜의 숲’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8년째 한국에 사는 그는 한국말에 막힘이 없었다. 윤리를 뜻하는 ‘ethics’를 한 번 쓴 것 말고는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할 때도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저자로서 ‘대통령의 서평’을 접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대통령 코멘트는 다 읽었어요.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8년간 한국에서 한 일에 대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전에 살던 미국과 독일에서도 대통령이 휴가 때 어떤 책을 읽었는지 종종 알려졌지만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책을 소개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대통령이 국정기조인 문화융성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왔지만 문화의 중요성을 다룬 책을 국무회의에서 얘기하고 주목하는 경우는 외국에서 찾아볼 수 없어요. 한국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대통령과 이전에 만나거나 교류한 적이 있습니까.

“문화융성위원회에서 6개월간 위원으로 활동했지만 대통령을 만날 기회는 없었어요. 대통령이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석 달 전쯤 대통령의 방미 아젠다에 대해 쓴 기고문이 한 일간지에 실린 뒤 청와대 홍보관들이 찾아와 함께 식사한 적은 있어요. 그 인연으로 대통령의 여름휴가 도서 목록에 내 책이 오르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월요인터뷰] 페스트라이쉬 교수 "선비는 현대사회 이상적 지식인상(像)…한국의 상징으로 키워야"
▷2년 전(2013년 8월) 출간된 책입니다. 책을 쓴 동기가 있습니까.

“원래는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의 기념비적인 저서 《일등 국가 일본:미국을 위한 교훈》 같은 책을 쓰고 싶었어요. 이 책은 일본을 얕보던 미국인의 인식을 바꿔놨죠. 저도 한국을 ‘아시아의 또 다른 일등 국가’로 소개하며 한국이 현재 1등의 위상을 가진 분야를 비롯해 한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알리는 책을 영어로 쓰려고 했습니다. 이런 구상을 한국의 여러 친구에게 설명했는데 다들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선진국이 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한국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드러내 보이는 것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잘 모르거나 알아도 외국인에게 잘 알려주려 하지 않는 한국만의 장점을 소개하는 책을 한국어로 써서 먼저 내기로 한 거죠.”

▷책 제목도 그런 의미로 붙인 것인가요.

“8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계속 ‘다른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싸이의 ‘강남스타일’에도 좋은 점이 있지만 더 깊이 있는 신념이나 비전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이 경제뿐 아니라 문화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전통문화에 있습니다.”

▷한국인이 모르는 장점은 어떤 것들입니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이 일군 기적의 바탕에는 수천년 동안 지속된 지적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한국사를 얘기하면서 이 부분을 빼놔요. 1950년대 한국은 1인당 소득이 아프리카 소말리아와 비슷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는데 효율적인 산업정책과 근면함, 교육열, 끈기와 열정 등으로 바닥에서 탈출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하는 식이죠. 이 설명의 행간에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어요. 1950년대 한국과 소말리아는 절대 비슷하지 않았죠. 구호 식량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사람 중엔 공학 전문가도, 국가 전략과 행정에 대한 수준 높은 식견을 갖춘 지식인들도 있었습니다. 500여년간 이어진 조선시대 우수한 행정시스템의 전통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통치체계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선 초기에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권력 분립과 투명한 행정,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태동했습니다. 왕은 다양한 세력과 소통하고 권력을 나눠야 했죠. 언로(言路)가 트여 있어 신하와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17~18세기엔 당대 세계의 중심인 명·청나라보다 우수한 통치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그 어떤 정부 시스템도 그토록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조선 지배층이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권력 다툼만 하다가 결국 나라를 뺏겼다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가엔 일제강점기에 정치적 필요로 심어진 인식의 영향도 있습니다. 주자학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켜 근대화했다는 논리죠. 저는 인정하지 않지만 해방 이후에도 그런 논리가 남아서 조선시대와 현대 대한민국을 단절시켜 과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문화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유산들을 좀 더 소개하면 무엇이 있습니까.

“책에 쓴 대로 고려시대 다문화 전통과 조선시대 사랑방 문화, 역관제도 등은 다문화 사회와 융합이 특징인 현대에 다시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17~18세기 예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적용한다면 막말과 비방이 난무하는 소셜네트워크 시대에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고 도덕적 행동을 권장하는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어요. 한국의 풍수지리는 미래형 생태건축의 철학으로 삼을 만하고, 한국식 유기농법에는 미래 농업혁명을 가져올 잠재력이 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소개할 만한 개념으로 ‘선비정신’을 제시했는데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글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중국과 일본의 고전과 사상을 공부하다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선비정신에 끌려서였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선비는 사회적 책임감이 강하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문화와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존재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오늘날 지식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잃고, 한정된 전문가로 살아가는 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시대에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동의하고 지지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선비정신에 녹아 있습니다.”

▷선비정신을 세계에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요.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급속히 높인 소설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클라벨이 영어로 쓴 ‘쇼군’이었죠. 어릴 때 이 책을 재밌게 읽고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아져 일본학을 하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영미권 작가들과 계약해 영어로 쓴 재미있고 수준 높은 한국 역사소설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쇼군과 같은 히트 소설이 나온다면 싸이의 강남스타일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장기간 지속될 겁니다. 다산이나 연암, 세종대왕 같은 역사적 인물을 깊이 있게 그린 영화를 내놓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직 그런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한 거죠.”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문화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 미국 예일대에서 중국 고전을 전공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중국과 일본의 한시를 비교연구했다. 하버드대 박사과정 중이던 1995년 서울대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글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한국 전통사상과 문학에 끌렸다. 이때 친구 소개로 중앙대 국악과 대학원에 다니던 이승은 씨를 만나 1997년 결혼했다. 이만열이란 한국 이름은 장인이 지어줬다. 결혼 후 미국으로 돌아가 교수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 자문 일도 했다. 2007년 충남지사 보좌관과 우송대 교수를 겸임할 수 있는 자리를 소개받아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10권을 영어로 옮긴 학자(서울대출판부 출간)로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한국어 저서로 《연암 박지원의 소설:간과된 세상의 변신》《 하버드박사의 한국표류기》《 세계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 등이 있다.

△1964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출생 △예일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도쿄대 비교문화학 석사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주미 한국대사관 자문관 △우송대 솔브릿지국제대 교수 △충남지사 보좌관 △표준연구원 자문관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송태형/박상익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