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정부 주도로 시작했다가 사실상 실패한 해외 곡물 조달사업이 민간 주도로 재추진된다.

30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국제 곡물시장 진출 실패 이후 국고로 환수했던 관련 예산 550억원을 재투자하기 위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시작했다. 2011년 정부가 곡물 조달 전문회사를 설립해 국제 곡물시장에 진출했다가 2013년 사업을 접은 지 2년 만에 다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본지 8월21일자 A1면 참조
해외 곡물 조달사업 재추진…정부, 민간 주도로 전환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곡물자급률이 24%밖에 되지 않는 한국에 해외 곡물조달 시스템 구축은 꼭 필요한 과제”라며 “다만 이전에 정부 주도로 시도해 실패했던 것을 민간이 이끌고 정부는 밀어주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제 곡물시장 진출을 선언한 하림그룹과 연계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하림은 지난 6월 벌크선사인 팬오션을 인수한 뒤 곡물 조달사업을 준비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식량안보 차원에서 자금을 지원하거나 지분 일부를 농협과 함께 갖고 들어가는 방식 등 여러 방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세계 곡물 파동 이후 정부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도하고 민간회사 3곳이 합작한 곡물 조달 전문회사를 세웠다. ‘한국형 카길’로 키워 한국에 필요한 해외 곡물을 수월하게 조달하겠다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비싼 엘리베이터(곡물 저장창고) 인수 가격과 주변 업체들의 견제로 시장을 뚫는 데 실패했다.

2011년 국제곡물시장 진출 당시 정부 주도로 민간을 끌어들이는 사업 모델에는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치열한 실제 곡물시장 현실과는 잘 맞지 않았다. 곡물업계 한 관계자는 “민간도 아니고 정부가 시장에 들어온다는 것에서부터 곡물 메이저들의 견제가 시작되고 곡물 엘리베이터 매물 가격도 크게 뛰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부는 곡물조달에 필요한 엘리베이터를 확보하지 못한 채 사업을 접어야 했다.

민간 주도로 전환

정부가 이번에 곡물조달사업 재추진을 결정하면서 사업 주도권을 민간에 넘기기로 한 이유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정부가 직접 사업자가 되기보다 노하우가 있는 민간기업이 시장에 나가면 지원하는 방식이 맞다는 데 공감대가 섰다”며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해 지원 방식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출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나 컨설팅 등 여러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청와대도 최근 이 같은 방안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박 대통령은 “옳은 방향이니 적극 추진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민간이 이끌고 정부는 뒤에서 밀어주는 방식으로 곡물조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곡물 수입량의 96%를 자국 곡물 유통회사로부터 공급받는다. 한국의 농협에 해당하는 젠노와 마루베니, 미쓰비시, 이토추 등 종합상사들이 곡물조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국내의 경우 정부 주도의 시장 진출 실패 이후 국제 곡물시장 트레이딩을 통한 수입량은 아예 없다.

하림 곡물 사업과 연계 검토

하지만 최근 하림이 국제곡물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민간 주도 곡물조달사업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하림은 연간 200만t가량의 사료용 곡물을 일본과 미국 상사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한때 세계 최대의 곡물 벌크선사였던 팬오션을 인수한 것도 곡물 분야를 미래 전략 사업으로 선정하고 투자하기 위해서였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내년부터 자체 필요량을 해외 상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구입해 들여올 것”이라며 “미국의 큰 곡물상과 협력해 한국과 중국, 일본에 곡물을 공급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차 자신이 붙으면 산지 엘리베이터도 사들이겠다”고 말했다. 이어 “5년 안에 국내 필요량의 30%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라고도 덧붙였다.

이미 해외 곡물 트레이딩 전문 인력을 채용했다. 팬오션 내 곡물사업실도 신설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곡물을 사들이던 축산기업이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를 보고 여러 연계 방식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곡물조달 시스템은 필수

정부는 올해 안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끝내고 관련 예산을 2017년부터 반영할 계획이다. 한 번 실패를 겪었음에도 한국 같은 곡물 수입 대국엔 한국형 곡물조달 시스템 구축이 필수라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기상이변이 잦아지면서 곡물의 국제거래 가격이 한순간에 급등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 농업 전문가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이 연간 430만t인데 수입하는 곡물량은 1600만t이나 된다”며 “해외 곡물 밸류 체인에 진입하지 못하면 결국 이를 공급하는 해외 회사들에 국내 곡물업계가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곡물 엘리베이터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를 말한다. 곡물을 창고에 저장한 뒤 선박 등 운송수단에 실어 옮길 때 승강기처럼 들어 올린다고 해서 엘리베이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위치와 역할에 따라 산지·강변·수출 엘리베이터 등으로 구분된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