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과 정유회사 등이 돈처럼 찍어내는 상품권이 비자금 조성 등 불법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만큼 발행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0만원이 넘는 고액 상품권이 크게 늘어난 데다 국내 상품권 발행액이 연간 10조원을 넘을 정도로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일각에선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16년 전 폐지한 상품권 규제를 재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면 소비 활성화와 같은 상품권의 순기능을 저해할 수 있는 만큼 규제 신설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돈처럼 찍어내는 상품권 연10조…규제 도입 논란
국회 입법조사처는 5일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게 제출한 ‘상품권 불법 유통거래 제한 필요성 관련 조사’ 보고서에서 “상품권은 어떻게 유통되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환전소에서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신분 확인 절차도 무시돼 불법자금으로 유통될 여지가 크다”고 분석했다.

상품권은 1994년 국내에 전면 허용된 이후 1999년 시장자율에 맡겨졌다. 정부는 당시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상품권 발행과 상환 등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던 상품권법을 폐지했다. 1만원권 이상의 상품권을 발행할 때 인지세를 내는 것을 빼면 누구든 발행할 수 있다.

상품권 시장 규모는 지난해 처음 10조원을 넘은 것으로 파악된다. 부문별로 △백화점상품권 5조원대 △정유상품권 약 8000억원 △문화상품권 6000억원대 △온누리상품권 약 3200억원 △제화상품권 등 기타 3조원대 등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한국조폐공사에서 찍은 상품권 규모만 6조8800억원에 이른다. 상품권 시장은 지난해 일시적으로 줄어들었지만 2010년 이후 성장세가 가파르다. 조폐공사에서 찍은 상품권만 봐도 지난해를 제외하면 2010년 이후 매년 30% 안팎 늘었다.

특히 고액 상품권 발행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2013년 A백화점은 50만원권 발행 비중이 전체 발행액 3조1900억원의 47.3%에 달하기도 했다. 때문에 현금과 다름없는 상품권이 기업 비자금 조성이나 뇌물수수 수단 등 불투명한 자금 거래 용도로 쓰일 여지가 많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임동춘 입법조사처 금융공정거래팀장은 “한국에선 인지세만 내면 누구나 상품권을 찍어낼 수 있고, 1만원권 미만이면 인지세도 붙지 않아 ‘검은돈’으로 세탁될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은 상품권 규제가 미흡한 실정이기 때문에 일본, 미국, 캐나다처럼 규제 근거를 법률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품권 순기능을 감안할 때 규제를 신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발행회사의 선매(先賣) 효과나 마케팅 효과를 비롯해 소비 진작 효과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훈 KB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공신력이 없는 회사에서 상품권을 발행한다면 이를 매입할 고객이 없듯이 상품권은 시장원리에 의해 작동된다”며 “규제 철폐 분위기 속에 새로운 규제를 신설하기보다 현재 있는 규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완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현재 총 10여개의 상품권 관련 법률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기획재정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각 부처에 흩어져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상품권 발행 ‘문턱’에 대한 규제보다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되는 상품권 관련 소비자 피해는 연평균 2000여건에 달한다. 대부분 상품권 유효기간이나 사용처 등과 관련된 분쟁들이다. 임 팀장은 “상품권 유효기간이 짧은 데다 유효기간이 지난 상품권의 판매액은 낙전수익으로 고스란히 발행업자의 수익이 된다”며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