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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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진미(盡善盡美).’ 박진회 한국씨티은행장은 지난해 10월 취임 일성으로 논어에 나오는 이 말을 꺼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고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상태가 바로 진선진미입니다.” 박 행장은 “삶의 나침반으로 여기는 구절”이라며 “금융인으로 30년간 일하면서 이 말이 금융인의 좌우명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다수 임직원은 어리둥절해했다. 보통 은행장이 취임할 때면 ‘실적 달성’이나 ‘철저한 리스크 관리’ ‘적극적인 영업’ 등을 강조하는데 박 행장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과정의 올바름을 거듭 주문했기 때문이다. 씨티은행 직원은 “임기가 3년밖에 되지 않고 첫 임기 실적으로 연임이 결정되는 한국 금융권에서 과정의 올바름이나 윤리의식을 앞서 강조하기는 사실 쉽지 않은데 취임식 자리에서 원칙을 강조해 다소 놀랐다”고 말했다.

‘본질’ 강조하는 원칙주의자

박 행장은 원칙주의자로 불린다. 그가 취임 직후 ‘민원 없는 은행’을 경영목표로 전면에 내세운 것도 원칙을 강조하는 면모와 무관치 않다. 박 행장은 은행업의 본질은 서비스산업으로 결국엔 고객 만족이 경영 성패를 가른다는 생각에서 임직원들에게 ‘민원 제로’ 은행을 주문했다.

민원 없는 은행이 되기 위한 박 행장의 접근법 또한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보통 은행들이 민원을 없애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창구 직원에게 더 친절히 하라고 교육하거나 더 꼼꼼히 고객에게 설명하도록 하는 정도다.

하지만 그는 민원이 단순히 창구에서의 불친절이나 안내 착오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았다. 판매하는 예·적금 및 대출 등 상품과 전산시스템, 은행 문화 속에 고객 민원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함이 내재해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씨티은행에서는 매달 상품개발부와 전산부, 일선 영업점 등 관련 부서가 모여 민원 근절 방안을 논의한다. 박 행장 취임 후 생긴 모임이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이런저런 고객 불만의 잔가지만 쳐내는 게 아니라 아예 뿌리를 찾아내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외형에 관계없이 ‘작지만 강한 은행, 편리하지만 안전한 은행’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 또한 겉보기보다는 근본에 집중하려는 박 행장의 스타일이 담겨 있다. 그는 다른 시중은행과 외형경쟁을 벌이기보다는 ‘4S(smaller·simpler·safer·stronger) 경영’을 통해 씨티은행 고유의 색깔을 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직원들과 맛집 찾는 따뜻함

[비즈&라이프] 박진회 한국씨티은행장 "고객 불만 하나라도 생기면 뿌리부터 찾아 없앤다"
박 행장은 원칙주의자지만 고루하거나 독선적이지 않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은 오히려 신선하고 온화하다는 평가가 많다.

‘진미탐방(珍味探訪)’이 대표적인 예다. 진미탐방은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각지의 유명 맛집을 돌아다니며 서비스 특징을 배워보자는 취지로 박 행장이 계획했다. 변화무쌍한 소비자 취향에도 한결같이 손님을 만족시키는 인기 식당의 비법을 배워보자는 것이다.

박 행장이 직접 추천한 음식점에 직원들을 데리고 가거나 각 지역의 영업점이나 행내 동호회 등에서 맛집 탐방을 신청하면 박 행장이 동행한다. 함께 식당을 찾아 음식을 맛보고 의견을 나눈 뒤 음식점 주인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해 듣는다.

최근 맛집 탐방에 동참한 한 직원은 “음식 재료가 가게로 오기까지의 과정과 손님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신경쓰면서, 식재료를 재배하는 농부의 삶 또한 어떻게 함께 좋아지도록 할 것인지 고민한다는 음식점 주인의 말을 들으면서 은행원의 자세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행장은 행장이 되기 전부터 직원 한 명 한 명을 챙긴 임원으로 유명했다. 씨티은행의 한 직원은 “박 행장은 예전부터 부하 직원에 대한 배려심이 많은 상사였다”며 다음 일화를 전했다.

“나이가 어린 한 직원이 경력으로 들어왔는데, 저보다 위인 직급으로 오게 됐습니다. 크게 상심했죠. 얼마 뒤부터 제가 당시 박 부행장에게 보고하던 일을 그 직원이 대신하게 됐는데 한번은 박 부행장이 저를 부르더니 ‘왜 더 이상 보고를 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랬구나. 길게 보면 별일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하더군요. 말단 직원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걸 보고 감동했습니다.”

박 행장의 리더십은 씨티은행의 안정적인 실적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취임 전인 지난해 상반기 대규모 희망퇴직으로 388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씨티은행은 지난해 하반기 1545억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흑자전환했다. 본격적으로 박 행장 임기가 시작된 올해는 상반기에만 1966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흑자 폭을 더 늘렸다. 역점 사업인 ‘민원 없는 은행’도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씨티은행의 1~3분기 누적 민원 발생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39% 줄었다.

흐트러짐 없는 선비

박 행장은 ‘2인자’로만 10년 이상을 지냈다. 2002년부터 한미은행 부행장을 맡았고 씨티은행이 한미은행을 인수한 2004년부터는 수석부행장을 줄곧 지냈다. 그의 위에는 늘 경기고, 서울대 무역학과 4년 선배인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현 은행연합회장)이 있었다. 하 전 행장이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한미은행장과 씨티은행장을 연이어 지내면서 ‘직업이 은행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면, 박 행장은 ‘직업이 부행장’이었던 셈이다.

10여년을 부행장으로 있으면서 때때로 다른 생각을 했을 법도 하지만 박 행장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는 게 주변의 공통된 전언이다. 오히려 하 전 행장을 도우며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박 행장이 기업금융 부문에서 탁월한 실적을 내면서 하 전 행장은 다른 부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박 행장은 행장 취임 당시에도 하 전 행장을 언급하며 “10년간 한국씨티를 이끌어 주신 데 대해 전체 임직원의 마음을 모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비록 업무적으로는 우리를 떠나지만 영원한 선배로 언제나 지도와 편달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씨티은행의 직원들은 이런 박 행장을 ‘사심(私心) 없는 선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박 행장을 보면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는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 박진회 행장 프로필

△1957년 전남 강진 출생 △1976년 경기고 졸업 △1980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3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MBA) 졸업 △1984년 영국 런던정경대(LSE) 경제학 석사 △1980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입사 △1984년 씨티은행 서울지점 입행 △1995년 씨티은행 자금담당 본부장 △2000년 삼성증권 운용사업부 상무 △2001년 한미은행 기업금융본부장 △2002년 한미은행 재무담당 부행장 △2004년 한국씨티은행 수석부행장 △2014년 10월~한국씨티은행장 박진회 행장 프로필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