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이애란 "25년 무명설움 떨쳐준 '백세인생'…가수 인생 대박났다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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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라~' 열풍으로 대세가 된 이애란 트로트 가수
백세인생 열창하는 장면 딴 '짤방', SNS서 다양하게 패러디 되며 인기
카톡 이모티콘·총선 로고송…찾아주는 곳 많아지니 몸값 높아져
갑작스런 인기 실감 못하지만 감동
'서울뚝배기' OST로 데뷔 준비
음반 못낸 후 무명생활 길어졌지만 '내 노래' 하고 싶단 열망으로 견뎌
성공 못보고 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
백세인생 열창하는 장면 딴 '짤방', SNS서 다양하게 패러디 되며 인기
카톡 이모티콘·총선 로고송…찾아주는 곳 많아지니 몸값 높아져
갑작스런 인기 실감 못하지만 감동
'서울뚝배기' OST로 데뷔 준비
음반 못낸 후 무명생활 길어졌지만 '내 노래' 하고 싶단 열망으로 견뎌
성공 못보고 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
그는 가수다. 25년 동안 노래해 온 가수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를 ‘짤방(‘짤림방지’의 줄임말로 인터넷상에서 글이나 동영상을 올릴 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붙이는 이미지를 가리킴)’으로 기억한다. 마이크를 들고 ‘백세인생’을 노래하는 그의 얼굴 아래에 “못 간다고 전해라” “재촉 말라 전해라” 등 가사 자막이 함께 깔리는 절묘한 순간. ‘박제된 순간’이 담긴 ‘짤방’이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그는 말 그대로 “자고 나니 스타”가 됐다. 트로트 가수 이애란 씨다.
최근 경기 하남시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이달 초 MBC 간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한 뒤 행사와 방송 섭외가 더욱 많아져 하루 일정이 매우 빠듯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수줍고도 순박하게 웃었다. 구성지고도 흥겨운 노랫소리와 달리 평소의 말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저 노래 좋아하는 변변치 못한 사람을 만나러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간식을 권하는 손길에선 인터뷰 전 상상했던 ‘벼락 스타’의 거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짤방’ 뒤에 숨은 긴 이야기
이씨는 “사실 짤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며 “지난 3월 ‘백세인생’ 음원을 발표하고 활동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얘, 요새 너 노래하는 게 인터넷에서 엄청 뜨고 있다’며 짤방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처음엔 제가 노래하는 표정이 별로 예쁘지 않아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참 재미있더라고요. 어쩌면 그렇게 다양하게 패러디하는지 신기했어요. 김장하러 오라는 시어머니께 ‘못 간다고 전해라’고 답장 보내겠다든지,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뭔가 지시할 때 직원이 ‘재촉 말라 전해라’고 한다든지, 자꾸 타박하면 ‘마포대교 간다 전해라’고 말하겠다든지…. 이렇게 뜨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죠.”
그는 초등학생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고루 인지도가 높은 트로트 가수로 급부상했다. 짤방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된 대중들은 “도대체 ‘백세인생’이란 노래가 뭐냐”며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가사 속 화자가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에게 “지하세계 염라대왕에게 전해달라”는 뜻으로 말하는 형식의 기발한 가사, 민요와 트로트가 결합된 독특한 가락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듣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묘한 중독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의 기쁨이 오기까지는 25년이라는 길고 긴 무명 생활의 슬픔이 있었다. 노래는 그에게 꿈과 힘, 삶의 의미였다.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안기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양면적 존재이기도 했다.
한창 노래 이야기에 열중하던 이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강원 홍천입니다. 딸부잣집 장녀였죠. 부모님께선 농사를 지으며 사셨어요. 전 어릴 때부터 유난히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즐겨 불렀죠. 아마 그래선지 몰라도 학교 선생님과 가족이 ‘넌 커서 꼭 가수가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평생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죠.”
1990년 KBS에서 방영된 인기 일일극 ‘서울 뚝배기’의 OST를 녹음하면서 가수 데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성공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정식 음반은 제작되지 못했다. 그가 부른 노래 역시 드라마에 삽입되지 않았다. 2006년 첫 음반을 내놓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렸다. 그렇게 기나긴 무명 생활이 이어졌다.
남의 노래 부르던 서글픔
이씨는 “가수에게 가장 서러운 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되물으며 말했다. “무명 가수끼리도 나름대로 ‘급’이 있어요. 자기 이름으로 노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집니다. 제겐 저만의 노래가 없었어요. 언제나 다른 가수의 노래를 대신 불렀죠. 그 때문에 무명 가수들 틈에서도 가장 낮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도 그건 정말 슬펐습니다.”
그래도 그는 노래했다. 전통시장과 회갑잔치, 동네 체육대회 같은 조그만 행사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양로원이나 요양원, 장애인 복지시설 등 자신의 목소리로 즐거워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를 부르며 봉사활동을 했다. “지금은 매니저가 세 명이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일을 혼자 했어요. 아직도 그 시절 습관이 많이 남아 있죠. 그 당시엔 그저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노래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25년 세월을 버티게 해준 힘입니다.”
첫 음반에 실패한 뒤 가수 생활을 완전히 접으려 했다. 그러다 사촌오빠가 “내가 아는 사람이 작사, 작곡을 하는 사람인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사촌오빠가 소개한 사람이 히트곡 ‘백세인생’을 작사·작곡한 김종완 씨였다. 현재 이씨의 매니저도 담당하고 있는 김씨는 원래 ‘백세인생’을 1995년에 만들었다. “제 친구 아버님이 예순도 못 돼 돌아가시는 걸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만든 곡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두 번 바뀌었습니다. 첫 번째는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였고, 두 번째는 ‘저 세상이 부르면’, 세 번째가 지금의 ‘백세인생’이죠. 이 노래에 맞는 목소리의 가수를 찾다가 이씨를 만났어요.”
이씨는 “‘백세인생’을 약 1년간 연습하면서 창법을 바꾸느라 애를 먹었다”며 “그 전엔 소리를 내지르는 데만 정신이 없었는데, 체계적으로 노래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가락을 몸으로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가수 인생은 이제 시작”
‘백세인생’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광고 계약도 하고, 카카오톡에선 그의 짤방이 유료 이모티콘으로도 나왔다. 새누리당에선 내년 총선 로고송으로 ‘백세인생’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알려졌다. ‘가수 이애란’을 찾는 공연 행사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고, 몸값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이씨는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슴이 울컥한다. 지난 5월 96세를 일기로 별세한 아버지가 떠올라서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가수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다른 곡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셨는데 유난히 ‘백세인생’만은 좋아하셨어요. 가사도 마음에 와 닿고, 딱 저한테 어울리는 곡이라고 하셨죠. 4년만 더 사셨으면 100세였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노래할 때마다 서글퍼져요. 그래도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많이 좋아하고 계시겠죠.”
그는 “진정한 가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다”며 “어렵게 쌓아온 길이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길 기도한다”고 강조했다. “공연 때마다 제 노래를 함께 따라 불러 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잘 견뎌왔다’고 저 스스로 위로합니다. 늘 겸손하게 열심히 살아야죠. 그동안 해왔던 봉사활동도 계속 꾸준히 할 겁니다.”
다만 그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자신의 노래와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무단 도용하려는 곳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저작권과 초상권을 존중해주길 간절히 원한다”며 “만약 상업적으로 노래나 영상, 사진을 사용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연락해 허락을 얻고 사용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험난한 기획사 오디션 통해 기약없는 연습생 거쳐야 데뷔
‘스타덤’ 오르는 건 9할이 운(運)
최근 SBS ‘K팝스타’와 Mnet ‘슈퍼스타K’ 등 신인가수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가수 지망생을 위한 실용음악과가 있는 대학도 많다. 그만큼 가수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선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디션을 통해 연예기획사에 발탁된 뒤 연습생 생활을 거쳐 음반 발매와 방송 및 행사 활동을 하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다. 우선 기획사 눈에 띄는 것부터 치열한 경쟁의 시작이다. 유튜브 동영상과 방송 출연, 대학 진학과 보컬 아카데미 수강 등 기획사 오디션 준비 과정이 매우 다양하다. 연습생 기간도 각기 다르다. 연습생 시절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수년간 노래와 춤, 운동 등 스타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가수로 정식 데뷔한 뒤에도 뚫어야 할 난관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줄잡아 수천명에 달하는 가수들 사이에서 대중에게 유명 스타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 “흔히 운칠기삼이라 하지만, 스타 가수가 되기 위해선 운이 아홉이거나 혹은 전부일 수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전언이다.
요즘엔 이른바 ‘차트 역주행’이란 말도 유행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됐던 곡이 유명 드라마 OST로 쓰이거나 가수의 공연 현장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등 뭔가 이슈가 터졌을 때 재조명되며 사랑받는 현상을 말한다. 복고 열풍을 타고 1970~1990년대 노래의 리메이크 역시 활발하다.
글=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사진=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최근 경기 하남시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이달 초 MBC 간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한 뒤 행사와 방송 섭외가 더욱 많아져 하루 일정이 매우 빠듯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수줍고도 순박하게 웃었다. 구성지고도 흥겨운 노랫소리와 달리 평소의 말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저 노래 좋아하는 변변치 못한 사람을 만나러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간식을 권하는 손길에선 인터뷰 전 상상했던 ‘벼락 스타’의 거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짤방’ 뒤에 숨은 긴 이야기
이씨는 “사실 짤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며 “지난 3월 ‘백세인생’ 음원을 발표하고 활동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얘, 요새 너 노래하는 게 인터넷에서 엄청 뜨고 있다’며 짤방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처음엔 제가 노래하는 표정이 별로 예쁘지 않아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참 재미있더라고요. 어쩌면 그렇게 다양하게 패러디하는지 신기했어요. 김장하러 오라는 시어머니께 ‘못 간다고 전해라’고 답장 보내겠다든지,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뭔가 지시할 때 직원이 ‘재촉 말라 전해라’고 한다든지, 자꾸 타박하면 ‘마포대교 간다 전해라’고 말하겠다든지…. 이렇게 뜨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죠.”
그는 초등학생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고루 인지도가 높은 트로트 가수로 급부상했다. 짤방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된 대중들은 “도대체 ‘백세인생’이란 노래가 뭐냐”며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가사 속 화자가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에게 “지하세계 염라대왕에게 전해달라”는 뜻으로 말하는 형식의 기발한 가사, 민요와 트로트가 결합된 독특한 가락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듣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묘한 중독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의 기쁨이 오기까지는 25년이라는 길고 긴 무명 생활의 슬픔이 있었다. 노래는 그에게 꿈과 힘, 삶의 의미였다.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안기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양면적 존재이기도 했다.
한창 노래 이야기에 열중하던 이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강원 홍천입니다. 딸부잣집 장녀였죠. 부모님께선 농사를 지으며 사셨어요. 전 어릴 때부터 유난히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즐겨 불렀죠. 아마 그래선지 몰라도 학교 선생님과 가족이 ‘넌 커서 꼭 가수가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평생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죠.”
1990년 KBS에서 방영된 인기 일일극 ‘서울 뚝배기’의 OST를 녹음하면서 가수 데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성공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정식 음반은 제작되지 못했다. 그가 부른 노래 역시 드라마에 삽입되지 않았다. 2006년 첫 음반을 내놓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렸다. 그렇게 기나긴 무명 생활이 이어졌다.
남의 노래 부르던 서글픔
이씨는 “가수에게 가장 서러운 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되물으며 말했다. “무명 가수끼리도 나름대로 ‘급’이 있어요. 자기 이름으로 노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집니다. 제겐 저만의 노래가 없었어요. 언제나 다른 가수의 노래를 대신 불렀죠. 그 때문에 무명 가수들 틈에서도 가장 낮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도 그건 정말 슬펐습니다.”
그래도 그는 노래했다. 전통시장과 회갑잔치, 동네 체육대회 같은 조그만 행사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양로원이나 요양원, 장애인 복지시설 등 자신의 목소리로 즐거워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를 부르며 봉사활동을 했다. “지금은 매니저가 세 명이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일을 혼자 했어요. 아직도 그 시절 습관이 많이 남아 있죠. 그 당시엔 그저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노래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25년 세월을 버티게 해준 힘입니다.”
첫 음반에 실패한 뒤 가수 생활을 완전히 접으려 했다. 그러다 사촌오빠가 “내가 아는 사람이 작사, 작곡을 하는 사람인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사촌오빠가 소개한 사람이 히트곡 ‘백세인생’을 작사·작곡한 김종완 씨였다. 현재 이씨의 매니저도 담당하고 있는 김씨는 원래 ‘백세인생’을 1995년에 만들었다. “제 친구 아버님이 예순도 못 돼 돌아가시는 걸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만든 곡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두 번 바뀌었습니다. 첫 번째는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였고, 두 번째는 ‘저 세상이 부르면’, 세 번째가 지금의 ‘백세인생’이죠. 이 노래에 맞는 목소리의 가수를 찾다가 이씨를 만났어요.”
이씨는 “‘백세인생’을 약 1년간 연습하면서 창법을 바꾸느라 애를 먹었다”며 “그 전엔 소리를 내지르는 데만 정신이 없었는데, 체계적으로 노래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가락을 몸으로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가수 인생은 이제 시작”
‘백세인생’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광고 계약도 하고, 카카오톡에선 그의 짤방이 유료 이모티콘으로도 나왔다. 새누리당에선 내년 총선 로고송으로 ‘백세인생’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알려졌다. ‘가수 이애란’을 찾는 공연 행사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고, 몸값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이씨는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슴이 울컥한다. 지난 5월 96세를 일기로 별세한 아버지가 떠올라서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가수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다른 곡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셨는데 유난히 ‘백세인생’만은 좋아하셨어요. 가사도 마음에 와 닿고, 딱 저한테 어울리는 곡이라고 하셨죠. 4년만 더 사셨으면 100세였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노래할 때마다 서글퍼져요. 그래도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많이 좋아하고 계시겠죠.”
그는 “진정한 가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다”며 “어렵게 쌓아온 길이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길 기도한다”고 강조했다. “공연 때마다 제 노래를 함께 따라 불러 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잘 견뎌왔다’고 저 스스로 위로합니다. 늘 겸손하게 열심히 살아야죠. 그동안 해왔던 봉사활동도 계속 꾸준히 할 겁니다.”
다만 그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자신의 노래와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무단 도용하려는 곳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저작권과 초상권을 존중해주길 간절히 원한다”며 “만약 상업적으로 노래나 영상, 사진을 사용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연락해 허락을 얻고 사용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험난한 기획사 오디션 통해 기약없는 연습생 거쳐야 데뷔
‘스타덤’ 오르는 건 9할이 운(運)
최근 SBS ‘K팝스타’와 Mnet ‘슈퍼스타K’ 등 신인가수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가수 지망생을 위한 실용음악과가 있는 대학도 많다. 그만큼 가수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선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디션을 통해 연예기획사에 발탁된 뒤 연습생 생활을 거쳐 음반 발매와 방송 및 행사 활동을 하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다. 우선 기획사 눈에 띄는 것부터 치열한 경쟁의 시작이다. 유튜브 동영상과 방송 출연, 대학 진학과 보컬 아카데미 수강 등 기획사 오디션 준비 과정이 매우 다양하다. 연습생 기간도 각기 다르다. 연습생 시절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수년간 노래와 춤, 운동 등 스타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가수로 정식 데뷔한 뒤에도 뚫어야 할 난관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줄잡아 수천명에 달하는 가수들 사이에서 대중에게 유명 스타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 “흔히 운칠기삼이라 하지만, 스타 가수가 되기 위해선 운이 아홉이거나 혹은 전부일 수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전언이다.
요즘엔 이른바 ‘차트 역주행’이란 말도 유행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됐던 곡이 유명 드라마 OST로 쓰이거나 가수의 공연 현장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등 뭔가 이슈가 터졌을 때 재조명되며 사랑받는 현상을 말한다. 복고 열풍을 타고 1970~1990년대 노래의 리메이크 역시 활발하다.
글=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사진=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