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초상', 지옥철·카톡 해고·불륜…한국의 어두운 민낯
굉음과 함께 지하철이 멈춰 선다.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아슬아슬하게 걷는 사람들이 출입구 앞으로 몰려든다. 백발노인, 만삭 임신부, 찌들 대로 찌든 중년 남성, 청춘 백수가 작은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서로를 밀치고 밀린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욕설을 내뱉기 시작한다. ‘삐’ 소리가 나자 그들은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새우같이 몸을 말아 눕는다.

지난 12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개막한 연극 ‘한국인의 초상’(고선웅 극작·연출·사진)은 희화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들의 몸짓과 대사는 과장돼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불행한 인간군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경쟁, 욕망, 트라우마,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이다.

연극은 출퇴근길 지옥철, 마마보이, 불륜, 성형 권하는 사회, 남녀 혐오, 카톡 해고 등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27개의 에피소드로 재구성했다.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그 안에 풍자와 과장을 섞었다. 자신의 아이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한 남성은 “일단 강남으로만 가면 술술 풀린단다. 기저귀도 독일제 프리미엄 펄프란다. 아토피, 땀띠 이런 거 전혀 염려 없지. 나처럼 살지 마. 이 막걸리처럼 뿌옇게 살지 말고 앱솔루트처럼 투명하게!”라고 외친다.

적재적소에 가미된 음악과 현대무용을 연상하게 하는 몸짓들이 극의 맛을 살린다. 특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불가능한 꿈’을 부르고, 율동까지 소화하며 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원로 정재진의 호연이 빛난다.

조롱과 풍자의 끝은 연민과 위로다. 대리기사들은 밤새 울려대는 ‘콜’을 받으며 셔틀버스에 오른다. 셔틀버스 운전기사는 동트는 새벽 떠오르는 해를 보며 이들에게 말한다. “해 보는 거야.” 그때 극장의 한쪽 벽면으로 난 네 개의 창이 열리며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래, 나무다 생각하고 살아. 태풍이 흔들어대도 뿌리는 짱짱해야지. 매일 해보면 알게 돼.”

쉽고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는 연극을 하고 싶다던 고선웅 극단 마방진 대표는 자신만의 연극 스타일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느낌이다. 오는 28일까지, 3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