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총선거를 앞두고 무작정 대기업을 본인 지역구에 유치하겠다거나, 주식회사를 시민기업으로 바꾸겠다는 등 정치인들의 비현실적인 공약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약을 제시한 후보들이 당선되면 선거 기간의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이행하라고 계속 압박할 가능성이 있어 해당 기업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공약에 휘둘리는 기업들] "대우조선 시민기업화" "기아차 40만대 증설"…무책임한 공약 남발
◆선심성 공약 쏟아져

여야 모두 이번 총선에서 광주광역시를 ‘자동차 메카’로 조성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자동차 연간 생산량을 100만대로 늘리겠다는 내용이다.

광주에는 기아자동차가 연간 62만대 규모의 공장을 가동 중이다. 100만대를 채우려면 40만대 규모의 새 공장을 지어야 한다. 신공장 건설에 필요한 투자 금액만 1조원에 달한다. 기아차 노동조합조차 “광주 공장 증설은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지적할 정도다. 하지만 2010년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100만 자동차 생산기지’ 공약은 반복되고 있다.

경남 거제에서는 대우조선해양을 시민기업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이 나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공식 지지 의사를 밝힌 이길종 무소속 후보다. 그는 “대우조선 지분을 거제시가 인수해 시민과 근로자가 공동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조원에 이르는 인수대금을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거의 검토하지 않은 대규모 투자 유치를 기정사실화하는 후보도 있다. 경기 시흥갑의 백원우 더불어민주당 후보 측은 “시흥 매화산업단지 1만2000㎡ 부지에 현대자동차 계열사를 유치할 것”이라며 “이미 시흥시와 해당 회사 사이에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으며 당선 후 정치적인 문제만 풀어주면 된다”고 말했다. 김윤식 시흥시장은 더민주 소속이다. 하지만 이 회사는 “안산에 있는 공장 이전지로 여러 지역을 물색하고 있을 뿐 시흥과 관련해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답변했다.

◆‘지역 법인화’ 공약도 나와

지역에 있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지점을 현지 법인으로 바꾸겠다는 공약도 쏟아지고 있다. 지점이 현지 법인으로 바뀌면 지역사회에 세금을 더 내고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홍보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비용만 더 든다”고 반박했다.

경남 김해을 선거구에 출마한 김경수 더민주 후보는 롯데아울렛의 현지 법인화를 요구하고 있다. 김 후보는 “롯데가 김해에서 돈을 벌어 세금은 딴 곳에 내고 있는데 현지 법인화가 해결책”이라며 “롯데도 신세계광주처럼 지역사회에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에선 시민단체까지 가세했다. 부산 지역 140여개 시민단체가 결성한 ‘부산총선연대’는 부산 지역 총선 후보자에게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등을 현지 법인으로 바꾸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의서를 보내 후보자를 압박했다.

롯데와 신세계 측은 “현지 법인이나 백화점 지점이나 지역에 내는 세금은 거의 같다”고 밝혔다. 지역 후보들과 시민단체, 지자체 등은 백화점 현지 법인이면 법인세의 10%를 지방소득세로 해당 지자체에 내기 때문에 지역 세수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지 법인이 아니라 백화점 지역 점포도 전체 인력 중 해당 점포의 인력이 차지하는 비율만큼 지방소득세를 납부하기 때문에 법인이든 일반 점포든 해당 지자체에 내는 세금은 차이가 없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현지 법인으로 전환하면 본사 법인과 지역 법인 둘로 나뉘어져 주주총회를 두 번 하고 재무제표도 두 번 작성해야 하는 등 부담만 증가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정책본부장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기업에 부담을 주는 공약을 양산하고 있다”며 “기업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투자와 경영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설/노경목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