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9월, 정부는 업종별 구조조정 추진 계획을 내놨다. “부실 우려가 큰 건설·조선·해운업종을 중심으로 고강도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금융위원회)는 게 골자다. 대상은 건설·조선·해운업종에 속한 277개사 중 46개사였다. 구조조정 ‘집도’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채권은행이 맡았다. 이후 10년 동안 신아SB, 진세조선 등 10개 남짓의 소규모 부실 조선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았다.

정부는 이와 관련, 성과를 낸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시장 평가는 다르다. 소규모 개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선제적인 구조조정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9개 주요 조선사 중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을 뺀 7곳이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지만, 8년이 되도록 조선업 구조개편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부실여신 '눈덩이' 국책은행] 나무만 보고 숲 못보는 구조조정…조선사 합병 8년째 '전무'
‘큰 틀’의 구조조정이 없는 한국

국내 산업재편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다. 거의 모든 업종에서 기업 경쟁력이 추락했다. 하지만 산업재편은 8년째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조선업종이다. 2008년 이후 국내 주력 9개 조선사 가운데 성동조선 STX조선 한진중공업 SPP조선 등 7개사가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다. 조선 ‘빅3’ 중 한 곳인 대우조선해양도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들 조선사에 대한 구조조정이 제각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데 있다. 부실 위기에 몰린 조선사 간 합병이 단 한 건도 없다. 지난해 성동조선과 STX조선을 합병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이마저도 채권은행 간 이견으로 무산됐다.

해운업종도 마찬가지다. 2009년께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위기가 감지됐지만 국책은행 등 채권단 차원에서 선제적 산업재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문제가 한발짝 물러선 정부를 대신해 국책은행 등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부는 “과거와 같은 방법을 쓰기는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주도로 진행한 빅딜은 3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이라는 실탄과 국가 부도 위기라는 특수성이 겹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지금 정부는 돈도 파워도 없다”며 “채권은행이 주도하고,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산업재편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본, 민관 협력으로 산업재편

금융권 등에선 일본의 산업재편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선산업 재편이 대표적이다. 한때 일본 조선산업은 세계 1위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에 밀려 1990년대 중반부터 경쟁력을 상실하자, 일본 정부가 움직였다.

1998년 일본 정부는 국토교통성 산하에 금융·산업계 전문가들을 모아 ‘조선산업 경쟁력 전략회의’를 꾸렸다. 이 회의를 통해 일본 정부는 8개 대형 조선사를 3~4곳으로 통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가 큰 틀을 짜고 은행이 자금을 대면, 업계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구조다.

산업재편은 빠르게 이뤄졌다. 2003~2012년 10년간 히타치조선과 일본강관(NKK)이 합병해 유니버설조선이, IHI·스미토모중기계가 합쳐 IHI마린유나이티드가 탄생했다. 2013년 이후엔 다시 유니버설조선과 IHI마린유나이티드가 합병해 재팬마린유니이티드란 거대 조선사가 출범했다.

일본은 디스플레이업종 재편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09년 26개 민간 기업과 정부가 공동 출자해 만든 ‘산업혁신기구’라는 민관 합동 펀드를 통해서다. 2조엔(약 22조원)의 자금을 갖춘 이 펀드를 통해 일본 정부는 반도체 연합기업인 르네사스테크놀로지, 중소형 액정표시장치(LCD) 통합회사인 재팬디스플레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업체인 JOLED 탄생을 주도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이라도 민관 합작 형태의 구조조정 협의체를 만들어 속도를 내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명/김일규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