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브렉시트, 진짜 유럽질서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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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통제하는 규제 쌓아온 EU
국가 간 자유경쟁 제거한 닫힌 사회
브렉시트 논의로 가짜 질서 깨질 것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
국가 간 자유경쟁 제거한 닫힌 사회
브렉시트 논의로 가짜 질서 깨질 것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EU에서 탈퇴할 것인가를 묻는 영국 국민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 자본, 물건, 서비스가 역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단일 시장을 향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로 출발한 게 EU다. 그러나 EU는 유럽인을 ‘자유의 길’ 대신 ‘노예의 길’로 안내했다. 자본·환경·상품 규제, 산업·농업 정책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인과 기업을 옭아매는 규제가 유럽의회를 통해 각 나라의 국내법이 됐다. 개별 국가의 차이를 무시하고 시장을 통제하는 획일화된 규제들이 첩첩이 쌓였다. 다양성은 질식되고 경제적 자유는 신음하게 된 것이다. EU가 중앙집권적 시장 통제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래서다.
통제된 경제가 지속적으로 번영하리라는 기대는 치명적 자만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이 1%에 불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내외의 미국과 스위스에 비하면 초라한 수치다. 회원국은 EU란 거대한 국가에 종속돼 있다. 각국 정부는 유럽의회가 시키는 대로 규제를 만들고 재판도 하면 된다. 각자 생산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창출하는 노력이 불필요하다. 자본·기업·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좋은 정책·법·제도를 창출하는 ‘국가 간 경쟁’이 송두리째 소멸된 것이다.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정치에 영향을 미쳐 이익을 챙기는 기업, 이익집단, 로비스트들로 들끓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브뤼셀을 ‘복지혁명’의 장으로 만들었다. 유럽을 ‘사회적 유럽’으로 만드는 게 EU의 목적이다. 복지권리를 시도 때도 없이 생산하는 곳이 브뤼셀이다.
EU는 지역 안정과 평화 정착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재정·금융 나눠먹기를 둘러싼 회원국 간 갈등, 계층 갈등, 브뤼셀과 회원국의 상호 불신 등 정치적 분열만 재생산해 왔다. 영국인들은 이렇게 노예의 길로 가는 EU에 반기를 든 것이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등 자유주의 거목을 탄생시킨 게 영국이 아니던가. 나폴레옹 지배, 나치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인들이 압제자의 노예가 될 때마다 그들을 구출하는 데 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영국이다. EU의 중앙집권과 경제통제로 노예가 된 유럽인을 구출하려는 것이 브렉시트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잔류파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타격이 클 것이라고 주장한다. 덴마크,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반(反)EU 세력이 강한 국가의 도미노 탈퇴로 EU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도미노 탈퇴는 잔류파에는 날벼락이다. 그 나라들의 탈퇴는 원심력으로 작용해 EU의 중앙집권적 통합 모델의 점진적 해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 모델의 지지자에게 악몽(惡夢)인 것은 개인이나 기업에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진짜 유럽질서’의 회복이다.
진짜 유럽질서는 유럽의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서 진화적 선별을 통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분권화된 질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기반으로 하는 ‘자생적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개별 국가는 자본과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생산적인 법과 제도를 창출하고 실험했다. 네덜란드와 런던, 베니스 등 기업하기 좋고 장사하기 좋은 법과 제도를 마련했던 곳으로 돈이 몰려들었고 그런 나라는 부강했다.
오늘날 전대미문의 번영을 뜻하는 ‘유럽문명의 기적’은 이 ‘진짜 유럽질서’ 덕이다. 그러나 EU는 브뤼셀 정치엘리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계획된 질서다. 열린 유럽사회가 닫힌 사회가 된 것이다. 이는 ‘가짜 유럽질서’다.
브렉시트는 두려워할 게 아니다. 그것은 빈곤, 갈등, 불안으로 가득 찬 유럽대륙의 가짜 질서를 평화, 번영, 풍요를 불러오는 진짜 유럽질서로 전환하는 촉매제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유롭고 행복한 유럽이 되는 길은 영국의 EU 탈퇴다. 그래서 브렉시트는 유럽인들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
사람, 자본, 물건, 서비스가 역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단일 시장을 향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로 출발한 게 EU다. 그러나 EU는 유럽인을 ‘자유의 길’ 대신 ‘노예의 길’로 안내했다. 자본·환경·상품 규제, 산업·농업 정책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인과 기업을 옭아매는 규제가 유럽의회를 통해 각 나라의 국내법이 됐다. 개별 국가의 차이를 무시하고 시장을 통제하는 획일화된 규제들이 첩첩이 쌓였다. 다양성은 질식되고 경제적 자유는 신음하게 된 것이다. EU가 중앙집권적 시장 통제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래서다.
통제된 경제가 지속적으로 번영하리라는 기대는 치명적 자만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이 1%에 불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내외의 미국과 스위스에 비하면 초라한 수치다. 회원국은 EU란 거대한 국가에 종속돼 있다. 각국 정부는 유럽의회가 시키는 대로 규제를 만들고 재판도 하면 된다. 각자 생산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창출하는 노력이 불필요하다. 자본·기업·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좋은 정책·법·제도를 창출하는 ‘국가 간 경쟁’이 송두리째 소멸된 것이다.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정치에 영향을 미쳐 이익을 챙기는 기업, 이익집단, 로비스트들로 들끓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브뤼셀을 ‘복지혁명’의 장으로 만들었다. 유럽을 ‘사회적 유럽’으로 만드는 게 EU의 목적이다. 복지권리를 시도 때도 없이 생산하는 곳이 브뤼셀이다.
EU는 지역 안정과 평화 정착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재정·금융 나눠먹기를 둘러싼 회원국 간 갈등, 계층 갈등, 브뤼셀과 회원국의 상호 불신 등 정치적 분열만 재생산해 왔다. 영국인들은 이렇게 노예의 길로 가는 EU에 반기를 든 것이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등 자유주의 거목을 탄생시킨 게 영국이 아니던가. 나폴레옹 지배, 나치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인들이 압제자의 노예가 될 때마다 그들을 구출하는 데 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영국이다. EU의 중앙집권과 경제통제로 노예가 된 유럽인을 구출하려는 것이 브렉시트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잔류파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타격이 클 것이라고 주장한다. 덴마크,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반(反)EU 세력이 강한 국가의 도미노 탈퇴로 EU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도미노 탈퇴는 잔류파에는 날벼락이다. 그 나라들의 탈퇴는 원심력으로 작용해 EU의 중앙집권적 통합 모델의 점진적 해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 모델의 지지자에게 악몽(惡夢)인 것은 개인이나 기업에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진짜 유럽질서’의 회복이다.
진짜 유럽질서는 유럽의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서 진화적 선별을 통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분권화된 질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기반으로 하는 ‘자생적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개별 국가는 자본과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생산적인 법과 제도를 창출하고 실험했다. 네덜란드와 런던, 베니스 등 기업하기 좋고 장사하기 좋은 법과 제도를 마련했던 곳으로 돈이 몰려들었고 그런 나라는 부강했다.
오늘날 전대미문의 번영을 뜻하는 ‘유럽문명의 기적’은 이 ‘진짜 유럽질서’ 덕이다. 그러나 EU는 브뤼셀 정치엘리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계획된 질서다. 열린 유럽사회가 닫힌 사회가 된 것이다. 이는 ‘가짜 유럽질서’다.
브렉시트는 두려워할 게 아니다. 그것은 빈곤, 갈등, 불안으로 가득 찬 유럽대륙의 가짜 질서를 평화, 번영, 풍요를 불러오는 진짜 유럽질서로 전환하는 촉매제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유롭고 행복한 유럽이 되는 길은 영국의 EU 탈퇴다. 그래서 브렉시트는 유럽인들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