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학자 김재근, 국내 첫 선박 설계한 조선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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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창의재단 공동기획
국민이 뽑은 과학자 (16) 김재근
독학으로 조선 산업 기틀 일궈
일제 때 잠수함 설계 참여 …광복 후 선박설계 기술 축적
작은 어선부터 1만t 배까지 64종 표준형선 설계 만들어내
국내 선박사 개척한 주인공
연구시기, 삼국시대로 확장
국민이 뽑은 과학자 (16) 김재근
독학으로 조선 산업 기틀 일궈
일제 때 잠수함 설계 참여 …광복 후 선박설계 기술 축적
작은 어선부터 1만t 배까지 64종 표준형선 설계 만들어내
국내 선박사 개척한 주인공
연구시기, 삼국시대로 확장
일제 치하에서 배 구조와 설계를 배울 수 있는 조선공학과에는 조선인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군함 구조와 설계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이다. 고(故)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1920~1999·사진)는 독학으로 한국의 조선공학을 일으킨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신종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스승도 없고, 체계적 수업도 없던 시절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 세계 1등 조선산업의 기틀을 세운 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내 1호 조선공학과 교수다. 경성제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함 설계에 참여하며 배 설계에 흥미를 두게 됐다. 선박 설계를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던 그에게 선박 구조의 기본 지식을 담은 원서 한두 권이 전부였다. 그는 훗날 “남들이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회사에 비치된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 한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술회했다.
8·15 광복 직후 국내엔 작은 고기잡이 배 한 척 설계할 기술력도 없었다. 지금은 전투함도 만들고 30만t이 넘는 컨테이너선도 건조하지만 당시만 해도 필요한 배는 전량 해외에서 수입했다. 그는 국립해양대(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와 서울대, 인하대에서 교편을 잡은 뒤 제자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며 선박 설계 기술을 쌓았다. 스스로 배워가면서 가르친 것이다. 1954~1955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조선공학과에 유학한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던 것은 배 모형을 실험할 수 있는 수조였다. 기회가 되는 대로 연구와 실험실습, 현장 경험을 한 그는 1년 만에 귀국선을 탔다. 유학 시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른 제자들보다 늦은 1968년에서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는 일보다 고급 두뇌를 한 명이라도 더 길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연구실이 부족하던 시절 김 교수는 제자들과 집에서 먹고 자며 배를 설계했다. 당시는 김 교수 연구진만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박 설계 기술을 보유했다. 이때 완성한 1t급 작은 어선부터 1만t급에 이르는 64종의 표준형선 설계는 국내 독자 설계의 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자인 김효철 서울대 명예교수는 “언제나 과학적인 근거와 체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도 항상 따뜻하게 대하셨다”고 회고했다.
대한조선학회장을 맡고 있던 김 교수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조선공업을 미래 먹고살 산업으로 소개했다. 이후 현대미포조선소가 들어서며 약진을 시작한 국내 조선산업은 1980년대 수주량 세계 2위를 기록했고 2000년대 들어선 1위에 올랐다. 신종계 교수는 “한국 조선산업만큼 인력 양성을 시작하고 20~30년 만에 세계 최고 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내에 선박사를 개척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1957년 이후 임진왜란 시절 활동한 거북선과 판옥선 등 우리 옛 선박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1980년대 전남 신안과 완도에서 이뤄진 수중 유물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조선에 국한되던 선박사 연구 시기를 삼국시대로 확장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김 교수는 국내 1호 조선공학과 교수다. 경성제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함 설계에 참여하며 배 설계에 흥미를 두게 됐다. 선박 설계를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던 그에게 선박 구조의 기본 지식을 담은 원서 한두 권이 전부였다. 그는 훗날 “남들이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회사에 비치된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 한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술회했다.
8·15 광복 직후 국내엔 작은 고기잡이 배 한 척 설계할 기술력도 없었다. 지금은 전투함도 만들고 30만t이 넘는 컨테이너선도 건조하지만 당시만 해도 필요한 배는 전량 해외에서 수입했다. 그는 국립해양대(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와 서울대, 인하대에서 교편을 잡은 뒤 제자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며 선박 설계 기술을 쌓았다. 스스로 배워가면서 가르친 것이다. 1954~1955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조선공학과에 유학한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던 것은 배 모형을 실험할 수 있는 수조였다. 기회가 되는 대로 연구와 실험실습, 현장 경험을 한 그는 1년 만에 귀국선을 탔다. 유학 시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른 제자들보다 늦은 1968년에서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는 일보다 고급 두뇌를 한 명이라도 더 길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연구실이 부족하던 시절 김 교수는 제자들과 집에서 먹고 자며 배를 설계했다. 당시는 김 교수 연구진만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박 설계 기술을 보유했다. 이때 완성한 1t급 작은 어선부터 1만t급에 이르는 64종의 표준형선 설계는 국내 독자 설계의 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자인 김효철 서울대 명예교수는 “언제나 과학적인 근거와 체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도 항상 따뜻하게 대하셨다”고 회고했다.
대한조선학회장을 맡고 있던 김 교수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조선공업을 미래 먹고살 산업으로 소개했다. 이후 현대미포조선소가 들어서며 약진을 시작한 국내 조선산업은 1980년대 수주량 세계 2위를 기록했고 2000년대 들어선 1위에 올랐다. 신종계 교수는 “한국 조선산업만큼 인력 양성을 시작하고 20~30년 만에 세계 최고 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내에 선박사를 개척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1957년 이후 임진왜란 시절 활동한 거북선과 판옥선 등 우리 옛 선박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1980년대 전남 신안과 완도에서 이뤄진 수중 유물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조선에 국한되던 선박사 연구 시기를 삼국시대로 확장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