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핵심계열사인 대한항공이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한 한진해운에 결국 600억원을 지원했다. ‘배임소지가 크다’며 반대해 온 대한항공 사외이사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작심 발언’ 후 조여드는 압박에 백기를 들었다. 매출채권(화물운송료)을 담보로 잡는다는 허구 명분을 앞세워 억지 자금지원을 결의한 것이다.

어차피 이런 수순이 되고야 말 운명이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주식회사 제도를 곡해한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과, 대통령의 판단을 오도케 한 잘못된 보고 가능성을 지적한 바도 있다. 이후 정부 업무가 정상궤도로 복귀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지만 역시 순진한 생각이었다. 정부는 조양호 그룹회장에 이어 사외이사들마저 제압하고 부채비율이 1100%인 대한항공에서 기어이 지원금을 뽑아냈다. 내 코가 석 자인 대한항공 주주들로선 기가 막힐 일이다. 사외이사들도 ‘배임’ 리스크에 노출됐다. 담보를 충분히 잡았다지만 회수를 장담하기는 힘들다. 예상을 웃도는 대규모 클레임이 생기면 매출채권 회수율이 급락할 수도 있다.

한진그룹 측에서 그렇게 짜낸 돈은 1300억원이다. 산업은행이 투입예정인 500억원을 보태면 총 1800억원이 마련됐다. 당초 법원이 추정한 물류대란 해소비용 1700억원이 충족됐지만, 여전히 900억원이 부족하다. 하역지체로 용선료와 유류비가 하루 24억원씩 늘어 소요자금이 2700억원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우선변제권을 적용받은 채권단의 DIP파이낸싱 대신 ‘대주주의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며 시간을 끈 결과다.

실망스러운 건 정부의 노골적인 협박이다. 금융감독원은 각 은행에 한진그룹 35개 계열사의 여신현황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여신 축소’라는 협박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은행 여신만 6.5조원인 한진에 여신 축소는 견디기 힘든 급소다. 정부는 ‘은행 건전성 점검차원일 뿐’이라지만 그 말을 누가 믿겠나. 부끄러움을 망각한 원초적이고 불법적인 국가 권력의 행사다. 계열사 위기전염을 차단한다는 것이 지난 30년 재벌정책의 목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돈을 안 내면 계열사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내걸었다. 이게 정상적인 국가 사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