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노벨상 22명 일본 과학, 그 뒤엔 '욱일기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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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고토 히데키 지음 / 허태성 옮김 / 부키 / 432쪽│1만8000원
고토 히데키 지음 / 허태성 옮김 / 부키 / 432쪽│1만8000원
‘한국 0 vs 일본 22.’
2016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지난 3일, 한국 언론은 일제히 ‘국내 기초과학의 슬픈 현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등의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일본은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대 명예교수(71)를 포함해 22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 언론은 오스미 교수가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요인으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를 파고든 ‘헤소마가리(へそ曲がり·외골수) 정신’을 꼽았다. 아사히신문은 “오스미 교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세포 속 쓰레기통’을 연구했다”며 “‘헤소마가리’의 개척정신이 노벨상으로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일본 과학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흔히 얘기하는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일부 과학자들의 ‘괴짜 기질’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 과학 저술가 고토 히데키는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에서 1854년 개국(開國) 이후 약 160년간의 일본 과학 발전 과정을 노벨상 수상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메이지유신,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패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일본 사회상을 배경으로 펼쳐낸다. 일본 과학 기술 발전에 일본 근현대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1860년대부터 서양에 유학생을 보내 근대 학문을 수용했다. 그들의 전공은 주로 의학과 화학이었다. 중국과 조선이 유교 정신에 속박돼 있을 때 일본이 필사적인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것은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이 컸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주창한 후쿠자와는 특히 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물질의 이치를 설명해 삼라만상의 법칙에 도달하는 물리학이 서양 학문의 왕자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훈몽궁리도해’ ‘물리요용’ 등 그가 펴낸 책들이 물리학 붐을 일으켰다. 1949년 이론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인 최초로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되면서 일본 물리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음을 보여줬다.
후쿠자와가 기틀을 닦은 자연과학은 일본의 군사력을 키우는 데 동원되면서 힘을 키웠다. 왁스를 섞어 폭발력을 대폭 높인 시모세 화약은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불에 타 무너지는 러시아 전함을 보고 세계 해군이 놀랄 정도였다.
이후 길고 긴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일본 과학자들은 국가와 양심 사이에서 기로에 서야 했다. 1945년 9월 도쿄대 전염병연구소에서는 ‘콜레라균 권위자’이던 오카모토 히라쿠 조교수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자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을 인공적으로 증식한 뒤 중국인에게 먹이는 인체 실험에 협력한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생리학분야에서는 중국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전역에서 모집한 연구자 1000여명이 세균전과 인체실험에 투입됐다. 세균학자 이시카와 다치오마루는 일본이 패망하자 표본을 몰래 숨겨 귀국한 뒤 연구에 쓸 정도로 집요했다.
저자는 과학자의 사회적 윤리와 책임 문제를 비롯해 일본 과학을 이끌어온 천재와 괴짜들의 에피소드와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한국 독자들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이 기초과학 발전의 토대이자 원동력이었다는 ‘불편한 진실’부터 마주하게 된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2016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지난 3일, 한국 언론은 일제히 ‘국내 기초과학의 슬픈 현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등의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일본은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대 명예교수(71)를 포함해 22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 언론은 오스미 교수가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요인으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를 파고든 ‘헤소마가리(へそ曲がり·외골수) 정신’을 꼽았다. 아사히신문은 “오스미 교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세포 속 쓰레기통’을 연구했다”며 “‘헤소마가리’의 개척정신이 노벨상으로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일본 과학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흔히 얘기하는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일부 과학자들의 ‘괴짜 기질’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 과학 저술가 고토 히데키는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에서 1854년 개국(開國) 이후 약 160년간의 일본 과학 발전 과정을 노벨상 수상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메이지유신,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패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일본 사회상을 배경으로 펼쳐낸다. 일본 과학 기술 발전에 일본 근현대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1860년대부터 서양에 유학생을 보내 근대 학문을 수용했다. 그들의 전공은 주로 의학과 화학이었다. 중국과 조선이 유교 정신에 속박돼 있을 때 일본이 필사적인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것은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이 컸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주창한 후쿠자와는 특히 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물질의 이치를 설명해 삼라만상의 법칙에 도달하는 물리학이 서양 학문의 왕자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훈몽궁리도해’ ‘물리요용’ 등 그가 펴낸 책들이 물리학 붐을 일으켰다. 1949년 이론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인 최초로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되면서 일본 물리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음을 보여줬다.
후쿠자와가 기틀을 닦은 자연과학은 일본의 군사력을 키우는 데 동원되면서 힘을 키웠다. 왁스를 섞어 폭발력을 대폭 높인 시모세 화약은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불에 타 무너지는 러시아 전함을 보고 세계 해군이 놀랄 정도였다.
이후 길고 긴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일본 과학자들은 국가와 양심 사이에서 기로에 서야 했다. 1945년 9월 도쿄대 전염병연구소에서는 ‘콜레라균 권위자’이던 오카모토 히라쿠 조교수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자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을 인공적으로 증식한 뒤 중국인에게 먹이는 인체 실험에 협력한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생리학분야에서는 중국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전역에서 모집한 연구자 1000여명이 세균전과 인체실험에 투입됐다. 세균학자 이시카와 다치오마루는 일본이 패망하자 표본을 몰래 숨겨 귀국한 뒤 연구에 쓸 정도로 집요했다.
저자는 과학자의 사회적 윤리와 책임 문제를 비롯해 일본 과학을 이끌어온 천재와 괴짜들의 에피소드와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한국 독자들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이 기초과학 발전의 토대이자 원동력이었다는 ‘불편한 진실’부터 마주하게 된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