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에 강한 신문 한경 JOB] 고려대생들의 취업 '솔직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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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졸업장이 취업보장 못해" 실감…친구들 재수·삼수 다반사
영어·인도네시아어 둘다 자신 있는데 올 가을 세번째 취업 도전
인문계생은 이공계와도 경쟁해야하는 처지
9급 공무원 준비하는 친구 때로는 부럽기도
영어·인도네시아어 둘다 자신 있는데 올 가을 세번째 취업 도전
인문계생은 이공계와도 경쟁해야하는 처지
9급 공무원 준비하는 친구 때로는 부럽기도
“취업이 안 돼 졸업을 1년간 미뤘습니다.”
지난 5일 고려대에서 만난 홍인욱 씨(27·경제학과 4년)는 풀 죽은 표정이었다. 그는 “19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살아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모두 자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취업은 좁은 문이었다. 그는 “이번 (가을) 공채가 세 번째 입사 도전”이라고 했다. 나성영 씨(26·행정학과 4년)는 “서류전형 합격률이 높은 이공계 친구들이 부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고려대는 졸업생 취업률이 67%에 달한다. 서울 주요 대학 중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인구론’(인문계 90%는 논다)이란 말까지 나오는 인문계생의 처지는 고려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5, 6일 고려대 안암 캠퍼스에서 이 학교 인문계 졸업을 앞둔 남학생 5명의 진로 고민을 들어봤다.
취업 위해 ‘재수, 삼수’ 밥 먹듯
이종규 씨(29·정치외교학과 4년)는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하다 떨어진 뒤 올해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막상 원서를 쓰고 싶어도 인문계생은 쓸 곳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푸념했다. 홍씨도 “모 회사 경영지원 부문에 원서를 내려고 봤더니 산업공학 계열만 지원할 수 있었다”며 “인문계생은 다른 인문계생뿐 아니라 이공계생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홍씨는 20곳에 입사 원서를 냈다. 6일까지 서류전형 합격자가 발표된 기업 8곳 중 3곳만 합격했다. 여기에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쳐야 한다. 지난해에는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묻지마 지원’을 한 탓에 모두 탈락했다. 올해는 대기업 상사와 해외 영업 직군으로 지원 범위를 좁혔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 입사 관문을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김모씨(28·영문학과 4년)는 “36곳에 지원해 6곳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며 “이 정도면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많이 합격했다는 의미에서) ‘역적’으로 꼽힐 정도”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 지원했다가 취업시장이 만만찮다는 것을 깨닫고 휴학을 했다. 1년간 준비를 거쳐 이번 학기에 복학했다. 그는 “‘자소서 복붙’(자기소개서 복사해 붙여넣기)은 절대 안 하는 게 원칙”이라며 “서류 합격률이 높은 이유도 자기소개서를 일일이 쓴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취업 대신 다른 진로를 고민하기도 한다.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정용수 씨(25)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지만 올가을 대졸 신입사원 공채에 한 군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정씨는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월화수목금금금’ 밥 먹듯이 야근하다 결국 퇴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취업과 진로에 대해 좀 더 고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대 지났다”
이들이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씨는 “국민은행 자소서를 쓸 땐 은행원이 됐다가 현대차 자소서를 쓸 때는 제조업 영업맨이 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나씨는 “같은 회사 같은 직무인데도 정량적 스펙이 부족한 사람이 합격하고 정성껏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불합격하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특히 서류 전형 합격자가 발표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고 했다. 이씨는 “고시공부를 할 때는 ‘한 개 회사만 합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후배를 위로했는데 막상 내가 ‘탈탈탈’ 털리고 나니 그게 미안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탈락 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고려대 졸업장이 더 이상 취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대학을 졸업해도 현실은 막막한데 부모의 기대 수준은 여전히 높은 점이 부담이라고 했다. 이씨는 “부모님에게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었고, 친척들에겐 ‘고대생 이종규’로 불렸는데 이런 게 큰 부담이 된다”고 했다.
나씨도 “모 기업 인·적성 시험을 보러 갈 때 아는 형이 ‘왜 거기를 가느냐’고 하더라. 어른들은 모른다. 고려대 나오면 다 쉽게 취업하고 고시 보면 다 되는 줄 안다. 정말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김씨는 “어떤 대학은 재학생의 취업을 위해 학교가 발벗고 나서지만 명문대는 학생들이 잘 할 거라 믿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취업에선 오히려 불리하다”고 했다. 정씨는 “일찌감치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이 밤 새워 작성한 자소서를 기업들이 정말 꼼꼼히 읽는지 의문이라고도 했다. 나씨는 “한 홈쇼핑 업체에 지원한 친구가 자소서에 다른 회사 이름을 써넣었는데도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어떤 회사는 지난달 22일 지원서를 마감한 뒤 1주일 만에 서류전형 합격자를 발표했다”며 “스펙으로만 재단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들은 기업이 채용하려는 직무에 필요한 핵심 역량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야 취업준비생이 불필요하게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기업에 원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늘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국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학벌시대는 지났다”며 “묻지마 지원보다 구직자들이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회사에 지원해야 개인도 행복하고 기업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
지난 5일 고려대에서 만난 홍인욱 씨(27·경제학과 4년)는 풀 죽은 표정이었다. 그는 “19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살아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모두 자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취업은 좁은 문이었다. 그는 “이번 (가을) 공채가 세 번째 입사 도전”이라고 했다. 나성영 씨(26·행정학과 4년)는 “서류전형 합격률이 높은 이공계 친구들이 부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고려대는 졸업생 취업률이 67%에 달한다. 서울 주요 대학 중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인구론’(인문계 90%는 논다)이란 말까지 나오는 인문계생의 처지는 고려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5, 6일 고려대 안암 캠퍼스에서 이 학교 인문계 졸업을 앞둔 남학생 5명의 진로 고민을 들어봤다.
취업 위해 ‘재수, 삼수’ 밥 먹듯
이종규 씨(29·정치외교학과 4년)는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하다 떨어진 뒤 올해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막상 원서를 쓰고 싶어도 인문계생은 쓸 곳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푸념했다. 홍씨도 “모 회사 경영지원 부문에 원서를 내려고 봤더니 산업공학 계열만 지원할 수 있었다”며 “인문계생은 다른 인문계생뿐 아니라 이공계생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홍씨는 20곳에 입사 원서를 냈다. 6일까지 서류전형 합격자가 발표된 기업 8곳 중 3곳만 합격했다. 여기에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쳐야 한다. 지난해에는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묻지마 지원’을 한 탓에 모두 탈락했다. 올해는 대기업 상사와 해외 영업 직군으로 지원 범위를 좁혔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 입사 관문을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김모씨(28·영문학과 4년)는 “36곳에 지원해 6곳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며 “이 정도면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많이 합격했다는 의미에서) ‘역적’으로 꼽힐 정도”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 지원했다가 취업시장이 만만찮다는 것을 깨닫고 휴학을 했다. 1년간 준비를 거쳐 이번 학기에 복학했다. 그는 “‘자소서 복붙’(자기소개서 복사해 붙여넣기)은 절대 안 하는 게 원칙”이라며 “서류 합격률이 높은 이유도 자기소개서를 일일이 쓴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취업 대신 다른 진로를 고민하기도 한다.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정용수 씨(25)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지만 올가을 대졸 신입사원 공채에 한 군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정씨는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월화수목금금금’ 밥 먹듯이 야근하다 결국 퇴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취업과 진로에 대해 좀 더 고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대 지났다”
이들이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씨는 “국민은행 자소서를 쓸 땐 은행원이 됐다가 현대차 자소서를 쓸 때는 제조업 영업맨이 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나씨는 “같은 회사 같은 직무인데도 정량적 스펙이 부족한 사람이 합격하고 정성껏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불합격하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특히 서류 전형 합격자가 발표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고 했다. 이씨는 “고시공부를 할 때는 ‘한 개 회사만 합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후배를 위로했는데 막상 내가 ‘탈탈탈’ 털리고 나니 그게 미안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탈락 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고려대 졸업장이 더 이상 취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대학을 졸업해도 현실은 막막한데 부모의 기대 수준은 여전히 높은 점이 부담이라고 했다. 이씨는 “부모님에게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었고, 친척들에겐 ‘고대생 이종규’로 불렸는데 이런 게 큰 부담이 된다”고 했다.
나씨도 “모 기업 인·적성 시험을 보러 갈 때 아는 형이 ‘왜 거기를 가느냐’고 하더라. 어른들은 모른다. 고려대 나오면 다 쉽게 취업하고 고시 보면 다 되는 줄 안다. 정말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김씨는 “어떤 대학은 재학생의 취업을 위해 학교가 발벗고 나서지만 명문대는 학생들이 잘 할 거라 믿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취업에선 오히려 불리하다”고 했다. 정씨는 “일찌감치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이 밤 새워 작성한 자소서를 기업들이 정말 꼼꼼히 읽는지 의문이라고도 했다. 나씨는 “한 홈쇼핑 업체에 지원한 친구가 자소서에 다른 회사 이름을 써넣었는데도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어떤 회사는 지난달 22일 지원서를 마감한 뒤 1주일 만에 서류전형 합격자를 발표했다”며 “스펙으로만 재단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들은 기업이 채용하려는 직무에 필요한 핵심 역량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야 취업준비생이 불필요하게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기업에 원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늘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국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학벌시대는 지났다”며 “묻지마 지원보다 구직자들이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회사에 지원해야 개인도 행복하고 기업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