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제의 과잉 정치화를 경계해야
한국 경제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진 분위기다. 경제성장률은 3분기 연속 0%대에 머물고 있어 올해 2%대 중반의 성장도 버거운 상황이다. 정부는 여전히 3% 가까운 성장을 기대하고 있지만 대부분 민간 연구소들은 2%대 초중반을 예상하는 것이 현실이다. 수출도 자동차산업 파업과 스마트폰 모델 단종 등으로 10월에도 3.2% 감소해 지난 22개월 중 한 달만 빼고 모두 감소세를 보였다. 취업시장도 얼어붙기는 마찬가지다. 취업자 수는 2015년 34만명 가까이로 증가했으나 올해는 29만명 수준에 머물고 있고 지난 9월에는 27만명에도 못 미쳤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회복세를 지속하지 못하고 2015년 1분기 이후 이미 재하강 국면에 진입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우니 한국 경제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국내 여건 악화에 의한 소비침체다.

가계가 쓸 수 있는 돈 중에서 얼마를 소비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평균소비성향이다.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소비성향은 지난 금융위기 이전 평균 77%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점차 하락하기 시작해 이제는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세계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던 기간에도 평균소비성향은 하락했다. 이제 다들 돈을 벌어도 쓰지 않는다. 그만큼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품이 붕괴된 이후의 일본을 보는 듯하다. 곧 소비가 회복될 여건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가계대출의 이자부담 규모는 이미 작년 말 38조원에서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현실이 되면 가계의 이자부담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내년에도 소비가 되살아나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한국 경제가 성장, 투자, 소비 등 모든 부문에서 무기력해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온 국민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똘똘 뭉쳤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수출을 중심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지금은 돌파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경제가 무기력증에 빠지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경제의 정치화다. 정치적 논리로 경제를 이끌어 가면 비효율성이 극에 달할 수 있다. 정치인 눈에는 경제도 정치의 일부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정치화가 과하면 경제적 비효율성이 누적되고 결국 남미와 같이 성장을 멈춘 채 서서히 가라앉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경제의 과잉 정치화를 경계해야 한다.

또 무기력증에 빠진 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선, 기업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서비스산업일 수도 있고 정보통신기술이 결합한 첨단 제조업일 수도 있다. 심사숙고한 뒤에는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과감히 나아가는 기업가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가계는 이럴수록 비전을 가지고 경제활동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경제활동을 하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면 경제는 다시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무기력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기업과 가계를 위해 정부와 정치인들은 조력자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투자를 저해하는 규제는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노동시장에 진입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 수 있도록 노조·정규직 중심의 노동시장 기득권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여기에 정치적 이해타산이 개입해서는 절대 안 된다. 지금처럼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우리 스스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꿈꿔야 할 시점이다.

변양규 <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