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깎아줄 테니 소송을 끝내자.”

국세청이 해외 지급보증 수수료 문제로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는 대기업들에 이런 전화를 걸고 있다. 국세청은 법원의 권고에 따라 세금 조정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해명하지만 기업들은 관련 소송에서 패한 국세청이 세금 감면을 무기로 소송 취하를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해외 지급 보증 수수료는 기업들이 해외 자회사의 현지 대출에 지급보증을 설 때 받는 수수료로 보통 0.1~0.2%다.

하지만 국세청은 이를 지나치게 낮은 ‘특혜’로 보고 자체 모형을 통해 산출한 1~2%의 수수료를 적용한 뒤 차액에 대해 법인세를 부과했다. 2012년 이후 국내 주요 그룹 계열사 70여곳에 4000억원대 세금을 부과했다. 기업들은 이에 반발해 국세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2015년 이후 관련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국세청이 기업들을 상대로 세금을 깎아줄 테니 소송을 끝내자고 제안하는 배경이다.
[국세청 '보증수수료 과세 논란] 4000억 수수료 과세소송…국세청 "세금 깎아줄테니 다툼 끝내자"
◆국세청, 기업에 소송 취하 제안

20일 재계에 따르면 한화케미칼, LG상사, 동국제강 등은 이미 국세청을 상대로 한 해외 지급보증 수수료 관련 소송을 취하했다. LG전자, LG화학, 현대제철,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등도 소송 취하를 검토하고 있다. 국세청의 전화를 받은 모기업 관계자는 “국세청 본청이 아니라 서울청이나 지방청의 소송 담당 주무관들이 전화로 소송을 취소하면 세금을 50~80% 깎아준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기업들에 소송 취소를 종용하는 것은 패소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2015년 10월 기아자동차와 LG전자, 효성, 동국제강, 태광산업 등 10개 기업과의 소송에서 모두 패소한 데 이어 지난해 1월에는 CJ, 현대자동차, 한국타이어, 두산 등 8개 기업과의 소송에서도 졌다. 법원은 “국세청 과세는 위법”이라며 “국세청의 과세 산출방법은 산업별 차이를 무시하고 개별 국가의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결했다.

과세 당시 국세청은 ‘새로운 과세 모형’이라고 자부했지만 법원은 ‘부당 과세’로 판정한 것이다. 국세청이 소송에서 패하면 이미 부과한 세금 전액을 돌려줘야 할 뿐 아니라 기업들의 소송 비용까지 물어줘야 한다.

◆무리한 과세 부메랑

국세청은 뒤늦게 세법을 개정해 수수료 산정 방식을 바꿨지만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법으로 수수료율을 규정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세청은 대기업들에 소송 취하를 압박한 것이 아니라 ‘법적인 조정 작업’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 세무당국 관계자는 “상호 간에 조정하는 것은 위법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세무 전문가는 “과거 부당한 과세에 대해 협상을 시도하는 것은 유럽에선 금지된 나쁜 관습”이라며 “1심과 2심을 거쳐 최종 판결을 통해 ‘부실과세’로 확정될 경우에 대비해 국세청 담당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계는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이뤄진 대기업들에 대한 무리한 세무조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국세청이 개인과 기업에 환급한 세금이 2015년 2조4989억원(4991건)에 달했다. 이는 금액 기준으로 전년보다 81.7%, 2013년보다 113.3% 급증한 수치다.

전직 국세청 간부는 “세수부족, 기강 확립 등을 이유로 대기업에 무리하게 과세한 측면이 있다”며 “새로운 과세를 추진한 직원들을 승진시키는 내부 분위기도 무리한 과세의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