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 형을 보내며"…진념 전 경제부총리 추도사 "경제 바로세우기에 솔선한 그대,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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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 주도
4대 부문 개혁 이끈 '조정자'…'소신과 정직' 공직사회의 귀감
4대 부문 개혁 이끈 '조정자'…'소신과 정직' 공직사회의 귀감
당대 출중한 경륜가를 먼저 보내는 마음 무겁습니다. 강 형과 선후배와 동료로서 고난과 보람을 같이한 세월이 어언 40년이 됐습니다.
개발연대 초기부터 왜 우리만 지구촌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인지 통탄하며 독일의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에서도 만들겠다는 소명으로 열정을 함께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조정하고 잘사는 경제,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함께하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강 형 기억하시겠지요?
1976년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을 준비할 때를 말입니다. 세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을 넘어 우리도 우리 형편에 걸맞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사회개발 전략을 경제 계획에 반영하겠다고 결의했지요.
당시는 건설, 수출 중심의 5개년 계획에 빈부격차 완화와 사회서비스 전략도 중점을 둬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록 과장과 사무관이었지만 사회개발 전략이 없는 4차 계획은 만들지 않겠다고 버티며 장·차관님들을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사회개발과 ‘형평’의 개념을 4차 계획에 반영했고 5차 계획부터는 계획의 명칭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경제사회 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꾼 기억은 아직도 큰 보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 형은 경제기획원 국장과 차관보, 그리고 노동부 차관을 거치면서 최저임금제와 고용보험제 도입에도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치면서 ‘환란 극복의 사령탑’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별 연고가 없었던 경제팀, 즉 재경부와 금융감독원, 기획예산처, 청와대 경제수석 등 이른바 ‘드림팀’이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을 개혁하고 망가진 시스템을 바로 세우며 IMF와 재협상을 이끌어 경제 회복을 앞당기고 있을 때, 강 형의 조정 역할은 정말 큰 힘이었습니다.
강 형은 또한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도입하고 4대 사회 보험제도를 확충하며 사회 안전망 구축과 ‘생산적 복지 정책’을 펼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공직자로서 강봉균은 소신과 배짱, 그리고 깨끗함과 정직을 실천하는 공직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호남 지역 출신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경제·사회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오로지 선공후사(先公後私), 소명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를 떠나서는 국회의원으로, 또 집권 여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으로서 진영 논리를 넘어 오로지 국가 경제 바로 세우기에 솔선했으며, 건전재정포럼의 대표로 경제·사회 분야에서 선배와 경륜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강 형, 지난해 11월30일 마지막 만남이 선하군요. 초췌한 모습으로 강 형이 주관한 《코리안미러클 4-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출간 모임에서 IMF 시절 ‘꿈의 4인방’이 다시 만나 옛날을 회고하며 함께했던 때를 말입니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에게 “한 달을 하더라도 경제는 부총리가 책임지고 이끌어 달라”고 결기 있게 격려하던 때를 말입니다.
그때 강 형은 “외환위기 극복 과정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최근 경제·사회적 혼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긍정적 사고를 강조했지요. 또 “국가 거버넌스(지배구조)와 시스템 개혁의 중대한 고비인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도 역설했지요.
강 형이 공무원으로서, 그리고 IMF 위기 극복의 조타수로서 보여준 성과는 우리 모두가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경제는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강 형의 지론을 다시 되뇝니다.
강 형, 40년간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잘 가시오. 이제 모두 내려놓고 영면하소서.
2017년 2월1일 진 념
개발연대 초기부터 왜 우리만 지구촌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인지 통탄하며 독일의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에서도 만들겠다는 소명으로 열정을 함께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조정하고 잘사는 경제,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함께하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강 형 기억하시겠지요?
1976년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을 준비할 때를 말입니다. 세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을 넘어 우리도 우리 형편에 걸맞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사회개발 전략을 경제 계획에 반영하겠다고 결의했지요.
당시는 건설, 수출 중심의 5개년 계획에 빈부격차 완화와 사회서비스 전략도 중점을 둬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록 과장과 사무관이었지만 사회개발 전략이 없는 4차 계획은 만들지 않겠다고 버티며 장·차관님들을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사회개발과 ‘형평’의 개념을 4차 계획에 반영했고 5차 계획부터는 계획의 명칭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경제사회 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꾼 기억은 아직도 큰 보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 형은 경제기획원 국장과 차관보, 그리고 노동부 차관을 거치면서 최저임금제와 고용보험제 도입에도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치면서 ‘환란 극복의 사령탑’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별 연고가 없었던 경제팀, 즉 재경부와 금융감독원, 기획예산처, 청와대 경제수석 등 이른바 ‘드림팀’이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을 개혁하고 망가진 시스템을 바로 세우며 IMF와 재협상을 이끌어 경제 회복을 앞당기고 있을 때, 강 형의 조정 역할은 정말 큰 힘이었습니다.
강 형은 또한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도입하고 4대 사회 보험제도를 확충하며 사회 안전망 구축과 ‘생산적 복지 정책’을 펼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공직자로서 강봉균은 소신과 배짱, 그리고 깨끗함과 정직을 실천하는 공직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호남 지역 출신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경제·사회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오로지 선공후사(先公後私), 소명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를 떠나서는 국회의원으로, 또 집권 여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으로서 진영 논리를 넘어 오로지 국가 경제 바로 세우기에 솔선했으며, 건전재정포럼의 대표로 경제·사회 분야에서 선배와 경륜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강 형, 지난해 11월30일 마지막 만남이 선하군요. 초췌한 모습으로 강 형이 주관한 《코리안미러클 4-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출간 모임에서 IMF 시절 ‘꿈의 4인방’이 다시 만나 옛날을 회고하며 함께했던 때를 말입니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에게 “한 달을 하더라도 경제는 부총리가 책임지고 이끌어 달라”고 결기 있게 격려하던 때를 말입니다.
그때 강 형은 “외환위기 극복 과정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최근 경제·사회적 혼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긍정적 사고를 강조했지요. 또 “국가 거버넌스(지배구조)와 시스템 개혁의 중대한 고비인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도 역설했지요.
강 형이 공무원으로서, 그리고 IMF 위기 극복의 조타수로서 보여준 성과는 우리 모두가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경제는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강 형의 지론을 다시 되뇝니다.
강 형, 40년간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잘 가시오. 이제 모두 내려놓고 영면하소서.
2017년 2월1일 진 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