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집무실에서 개방과 경쟁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집무실에서 개방과 경쟁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차병석 산업부장
차병석 산업부장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75) 집무실에 들어서자 탁자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김 회장이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일 때 썼다는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다. 지난달 수출이 4년 만에 두 자릿수 증가로 회복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김 회장은 “대선 주자들이 시장경제체제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표만 의식한 정치인들이 ‘기회비용’이라는 경제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고 정책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경제관료로 30여년, 민간부문에서 18년간 한국 경제를 고민해 온 김 회장은 1시간30분의 인터뷰 시간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한국 경제의 진단과 처방을 토해냈다. 그를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만났다.

▷일각에서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위기 상황이라고 지적합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때마다 성급하게 위기론부터 나옵니다. 무역액이 1조달러에서 9500억달러로 줄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드는데 그렇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과장된 위기론이 국민의 자신감을 위축시키는 게 문제예요. 한국적 위기의 재생산 구조지요. 성장 둔화, 실업자 증가 등은 그저 표면적 현상일 뿐입니다. 위기의 본질이 아니에요. 위기를 부르는 가장 큰 요인은 ‘인식의 결여’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위기구조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월요인터뷰]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 "저성장·수출 부진은 위기 아냐…시장경제 거꾸로 돌리는 게 진짜 위기"
“한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을 달성한 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85개 국가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곳은 한국이 유일해요. 기적의 역사지요. 많은 나라가 독립 이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없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가 시장경제체제를 고수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걸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반경 2000㎞ 내 약 15억명의 시장에 둘러싸여 있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튼튼한 제조업 인프라가 있습니다. 우리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인식의 위기죠.”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박정희 대통령 이후 한국 경제 경쟁력의 원천으로 작동해온 ‘한국주식회사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죠. 기업 경쟁력은 오로지 진정한 경쟁적 구조의 시장에서 나옵니다. 경쟁적 시장 구조가 한국에서 퇴색하고 있어요. 정치인들은 한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대선 주자들도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내놓고 있고요. 기업이 경쟁을 못 하게 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필연입니다. 시장경제체제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위기의 본질입니다.”

▷야당의 상법 개정안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정치인이건 정부 관료건 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경제의 기본 원칙은 간단한 것 아닙니까. ‘공짜 점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내줘야 합니다. 기회비용 개념이지요. 상법 개정안은 과도해진 경제 권력을 견제하겠다는 논리에서 출발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법 도입으로 얻을 이익과 부작용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개정안대로라면 부작용이 훨씬 큽니다. 그런 부작용으로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정치인들이 책임집니까.”

▷과도한 기업 규제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겠지요.

“맞습니다. 정치인은 선거 때가 되면 표만 보인다지만, 도가 지나칩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 문제는 제가 공정거래위원장일 때인 1996년에도 나온 얘기입니다. 감시의 눈을 늘려 재벌을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지요. 하지만 한국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사건이 일본 미국보다 수십 배나 많은 나라입니다. 경제법의 특성을 모르는 일반 기관들이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에까지 소송을 남발하면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재벌개혁 주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공정위원장을 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대기업 권력은 규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책의 효율성을 생각해야 돼요. 기업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규제가 아니라 경쟁입니다. 대기업 규제 정책을 수십년간 해 왔지만 경쟁력 저하로 시장에서 외면받아 망한 기업은 있어도, 규제로 망한 회사는 없습니다. 대외 개방을 통해서 경쟁구도를 확립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를 정부나 정치권이 칼을 휘둘러 풀겠다는 생각은 위험하지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구속 사유가 있으면 당연히 구속해야죠. 하지만 법에 규정된 구속 사유에 해당하는지는 의문입니다. 형사소송법상 구속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주거가 불확실하거나, 증거 인멸 가능성이 있거나, 도주 우려가 있을 때 하도록 돼 있습니다. 이걸 판사가 판단하는 데 10시간이나 필요할까요. 이 부회장 구속은 법 조문만이 아니라 법 바깥의 상황을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은 국민 여론뿐 아니라 경제·사회적 부작용도 고려했어야 합니다. 또 구속은 유·무죄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다들 죄를 지은 게 확실한 듯 말을 하고 있어요. 죄형은 법정에서 재판으로 가리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정부는 기업이나 산업을 책임질 정도로 유능한 조직이 아닙니다. 관료들은 문제만 생기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어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가리는 것이 유능한 정부입니다. 정부는 시장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시장의 반응은 보기에는 느리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인내가 필요하죠. 시장실패보다 정부실패를 조심해야 합니다. 정부가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시장원리로 풀 수 없는 ‘공짜 점심’의 영역이죠.”

▷복지정책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복지문제만 해도 그래요. 논란이 되고 있는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의 문제는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 입장에서 보면 답이 나옵니다. 왜 정부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건강까지 걱정해야 합니까.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정부가 챙기지 말아야 혁신도 나오고 신산업도 성장합니다. 지금 공무원이 하는 일 중에 안 해도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확신이 없으면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도 오히려 경제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기 극복의 최선의 방책은 무엇입니까.

“기업에 좋은 것이 국가에 좋고, 국가에 좋은 것이 기업에 좋다는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업가형 국가’ 실현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미래는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이 주체적으로 헤쳐나가는 시대예요. 기업가형 국가는 기업이 성장, 고용, 복지, 분배 등 경제 과제 해결의 주체가 되고 정부는 정책과 제도로 생산적·창의적 기업 활동을 뒷받침하는 국가입니다.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면 저성장 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남 피살 사건으로 안보 위기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라면 안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대북(對北) 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당한 사람 잘못입니다. 역대 정권은 하나같이 북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어요. 개성공단 같은 건 판단 착오입니다. 공단을 우리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에 지었어야죠.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도외시한 국가의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세습 왕조국가인 북한에 핵은 정권 유지 수단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제국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의 격언을 잘 새겨야 합니다.”

■ 김인호 회장은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1997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할 때 외환위기 책임론에 몰려 직무유기, 직권남용 혐의로 당시 강경식 재정경제원 장관과 함께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김 회장은 1, 2, 3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정책적 판단은 사법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고 봤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한국 기독교 농촌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故) 김영환 목사의 차남이다. 음악 애호가로 유명하다. 2016년 무협 7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행진곡’을 지휘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장으로 귀환》 등이 있다.

△1942년 경남 밀양 출생 △1960년 경기고 졸업 △1966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행정고시 4회 △1973년 미국 시러큐스대 행정학 석사 △경제기획원 차관보 △환경처 차관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2015년~ 한국무역협회 회장

정리=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